연애프로그램과 <하트시그널 2>
한창 프로그램이 유행할 때 또래 친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환승연애> 이야기가 적지 않게 오르내렸다. 누군가는 질겁을 했겠지만 누군가는 혹시라도 관계에 여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출연을 고민해 볼지도 모른다며, 괜히 진지한 가정을 하는 실없는 이야기이다. 모르긴 몰라도 신드롬이었던 것은 확실히 체감했다. 전 연인과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서로가 새로운 이성을찾는 과정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직관까지 해야 한다니. 막상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감정 소모가 엄청나긴 해도 보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이 단어를 그렇게까지 선호하지는 않지만) 도파민 그 자체다. 남 연애 과정을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시놉을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더 틀었다. 전 남자친구가 새로운 이성과 데이트를 나가자 눈물을 보이는 명장면을 남기며 드라마보다도 더 현실적인 감정을 보여준 해은의 성장 서사는 2030 시청자 사이에서 '대박'적인 화제성을 가져왔다. 새로운 메기였던 현규가 전 연인이었던 규민과의 관계에서 고민하던 해은을 용기 있게 쟁취하는 장면들은 일명 '직진 연하남'이라는 캐릭터를 남기며 아직까지도 핫하게 회자되는 '연프' 서사로 남게 됐다.
여기까지 <환승연애>를 간략하게 예찬하는 글을 썼지만 사실 나는 환승연애를 끝까지 정주행하지는 못 했다. 1편에 이어 화제가 된 2편도 그랬지만 전 애인이 다른 이성과 나간다는 압박적인 상황을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상황을 대리체험하는 것 같아 에너지소모가 적지 않았다. "전 연인과 방송을 나오다니, 도대체 그런 생각은 '누가' '왜' 하는 거야?"라는 어떤 이의 물음표 가득한 표정처럼 아마 <환승연애>의 내용을 처음 들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마를 쳤을 것이다. 너무 싫다 싶으면서도 듣는 순간 이상하게 혹 한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게 상상도 하지 않았던 내용을 듣고는 없던 미련도 방송이라는 플랫폼이 등장하니 각성되는 듯한 느낌이다. 찝찝하게 끝난 사람이면 어떻게 잘 사는지 문득 거들떠보고 싶어 지거나 아쉬움이 남은 사람이라면 더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거나 혹은 그렇게 변했을 상대가 궁금했던 적 살다가 한 번쯤 정도는 모두가 있지 않을까? 모두의 머릿속을 잠깐 스치고만 지나갔을 생각을 구체화한 결과물이 역대 티빙 최고 유료 가입자수를 가져다준, 어안이 벙벙하지만 솔깃한 이 포맷이다.
<하트시그널>을 필두로 한 감성적인 연애프로그램의 서막이 열리고 따뜻한 분위기의 참가자들이 나와 기분 좋은 설렘을 전하는 프로그램들이 대거 등장했다. 뒤 이어서 <러브캐쳐>라는 특이한 포맷도 등장한다. 사전에 '머니캐쳐'의 캐릭터성을 부여받아 참가한 이가 진심으로 연인으로서의 성사를 바라는 '러브캐쳐'인 상대와 매치가 되면 상금을 가져가는 게임 포맷 연애프로그램의 시초를 알렸다. 뒤이어 연예인과 일반인 매칭을 시켜주는 잘 만들어진 드라마 한 편같은 프로그램부터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뽑았냐는 말이 튀어나오는 대한민국 내 인격의 독특함을 다 모아놓았다고 할 수 있는 <나는 솔로> 시리즈도 있다. 시즌 별로 마라맛과 같은 통렬함을 때려 붓는 기막힌 상황의 연속이라 과연 막장드라마도 못 따라올 '인간군상'시리즈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5분 안으로도 몇 번씩 상황이 급변해 눈을 한번 뗐다가는 빌런이 누구에서 누구로 옮겨졌는지 다시 테이프를 돌려 감아봐야한다. 되돌려 보는 순간마저도 재밌는 예측불허의 집합체를, 시청자가 그 안에 투입된 것만 같은 생동감 있는 경험으로 선사받을 수 있다. 일부 시청자층은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들이 등장하는 '딴 세상 이야기'로 연애프로그램을 즐기는가 하면 '나라면 어떤 감정일지' 본인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련함 같은 감정을 찾는 데에서 흥미를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 접점의 시청자층을 적절하게 공략하는 것에 성공한 프로그램이 <환승연애>였다고 본다.
다양한 연애프로그램들이 숱하게 생겨나는 요즘, 자극적인 소재들에 마음이 피로해졌을 때 서랍장에 아껴놨던 부드럽고 따뜻한 코코아를 꺼내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꺼내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예전에는 찬바람이 슬슬 불어올 때 정말 코코아를 마시면서 봤는데 이제는 여름에도 본다. 슴슴하게 천천히 마음을 덥히다가 차츰차츰 끓는점으로 도달하는, 다각적인 요소들을 잘 요리해 낸 프로그램인 <하트시그널 2>이다. 이후 많은 연애프로그램들이 화제가 되어왔지만 서사의 기승전결이 완전하게 구성되어 시청자가 따라갈 수 있는 극의 형태를 갖췄다는 면에서 <하트시그널 2>의 완성도는 두고두고 빛을 발한다. 누구라도 언젠가 느꼈을 간질간질한 순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회차마다 삽입된 적재적소의 BGM과 감성적인 연출은 다른 프로그램과 차별점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다. 대중들이 감성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연출이라고 느끼는 건 단순히 음악과 장면의 배치의 구조적인 요소들만이 아니다. 갖가지의 서사를 디테일하게 조명하고 청자로 하여금 기억 저편에 묻어둔 어린 날의 감정과 경험을 이끌어내며 극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이런 서사를 보여주기 위해 인물들의 타임라인을 일부 꼬거나 순서를 바꾸는 방법을 썼지만 납득가능한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한 일환으로는 완벽하게 성공이다.
일반인을 내세운 연애프로그램의 신드롬급 인기의 서막을 올린 작품이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이던 나도 영주와 도균의 감성적인 대화를 보고 정주행을 시작했었다. 집착하지 않되 차분히 본인의 마음을 돌보며 상대를 기다렸던 현주의 모습까지, 나에게는 이들이 어른스러운 대화방법의 정석 같아서. 차분한 톤으로 격동 치는 감정을 잔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도균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모든 영상매체마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잊을만하면 꺼내보는 선물로 자리하는 때가 있다. 유독 어린 날에 봤던 이 프로그램은 이성적인 어른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마주하고 이를 표현할 때는 서툰 사람이 되어버리는 솔직하고 인간적인 모습들이 어떤 드라마들보다도 인상에 남았다. 어떤 마음으로 저런 말과 행동을 했을지가 보이는 부분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도 또 다르다. 해마다 보는 프로그램이지만 볼 때마다 처한 상황이 달라지고 경험이 쌓이면서 받아들이는 감정의 진폭이 달라지는 게 참 신기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감정에 충실했고 한정된 상황과 오해에도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던 진심 어린 출연자들도, 음악도, 연출도 모든 요소들이 이렇게 정갈한 형태로 조화되어 전해질 수 있다니.
어느덧 그때의 영주와 현주의 나이가 되어 많은 일을 겪고 나서도 나는 저렇게 내 감정에 솔직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어른이 되었는지는 아직 확신이 없다. 특정한 상황에 처해 감정들이 불쑥 나를 통과할 때, 그에 대한 반응을 부드럽게 정리해서 표현하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은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매번 새로운 위기와 감정에 매몰되는 것은 나이와 경험과 상관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의 상황에 충실하게 대처하려 노력한다는 건 감정이 태도로 치환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감정으로 호소한다거나 내 감정을 받아들여주길 요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상대 또한 이전부터 내가 느껴온 감정과 비슷한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다는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단편적인 지표와 신호만으로는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았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그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은 어디까지나 재단에 불과하다. 인물들은 서운한 상황에서도 꽤나 정돈된 방식으로 본인들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한다. 깨끗한 진심을 전달한 이후의 선택은 상대방의 몫임을 알면서도 서운한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대처하는 각자의 방식이 다른 점이 인상에 남는다.
<하트시그널 2>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프로그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연출과 음악을 웰메이드 드라마 수준으로 꾸려냈다는 것 이외에도 결국 이들은 드라마 속의 정형화된 캐릭터가 아닌 일반인이기에, 때로는 온건했다가도 또 감정적이었다가 변화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보여준 게 시청자들에게 크게 와닿은 포인트였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일관적일 수 없음으로써 인간적일 수 있게 되는 거니까. 그럼에도 그 불안정하고 서툰 마음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고, 그 마음을 기꺼이 바라보고 다독여줄 상대가 있다면 치유하고 고쳐나갈 수 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기도 하는 숱한 경험들로 마음을 닫은 것 같다가도 끝내 상대여여만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마음을 열기로 결심하는 다정한 어른들의 연애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응원을 보냈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음을 반짝이는 연출로 풀어내며 순도 높은 감정과 관계가 서사에 녹아들어 있는 게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이런 완성도와 감각을 가진 프로그램을 만들면 얼마나 기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