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스포일러 포함
때는 2013년, '진격의~' 유행어가 방송가를 장악한 밈이 될 정도로 한 차례 선풍적인 <진격의 거인>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이내 만화책 버전을 통한 작가의 우익논란이 발화되며 그 유행도 가라앉았다. '진격의 거인은 우익만화인가?'의 의문과 의심을 져버리지 못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시청을 망설여왔다. 그리고 대략 10년이 지난 지금 유튜브와 SNS 등지에서 대대적인 '진격거' 유행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체감상으로는 귀멸의칼날이 한창 유행했던 때만큼은 미치지는 못하는 것 같다만 여러 해석들을 보니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된 만화책 내 에렌과 아르민의 대사를 수정하여 애니메이션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증오를 더 가깝게 담아낸 것을 보고는 부채감을 덜고 시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진격의 거인을 보다보면 일정 회차를 넘으면 특이점이 온다. 그럼 그동안 '가족을 위해 동포를 위해 몇백명의 조사병단들이 바쳤던 목숨의 진의는 무엇인가?' 악이라고 소탕해왔던 적들이 사실은 본인의 선조이자 동포였고 그동안 그렇게나 썰어왔던 적들은 사실 진정한 적이 만든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삶의 목적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무상한지를 보여준다. 극중 케니의 대사가 이를 표상한다. 인간이 목적이랍시고 설정해왔던 저마다의 꿈은 사실 잔인한 현실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기 위해 어딘가에 취해있기라도 해야됐기 때문에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앨빈도 마찬가지고 에렌도 마찬가지다.
목적이 바뀌면 흐름에 따라서 새로운 목표로 나아가면 된다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관은 그렇게 얄팍한 희생을 담보로 하게 놔두지 않는다. 살상무기로 거인을 만들어 보낸 벽밖의 인류가 파라디섬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의 일생은 전면적으로 부정당한다. 몇 번이고 화해의 교섭을 시도 했으나 일말의 빈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조사병단 일행은 거인에서 인간으로 그 적의의 대상을 바꿔야 할 때도 막대한 정체성의 혼란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예거파는 국민들을 선동하여 땅울림의 정당성을 세뇌하고 반예거파는 참상을 막기위해 생사를 함께한 '인간'인 동료를 저지하려 총을 겨눴다. 목표는 바꾸면 그만이라기에는 그들이 가진 사랑이나 가족을 지킨다는 개인의 목표는 대의라는 거대한 목표에 의해 몇번이고 무릎이 꿇려져욌다.
대의가 부정당하고 교체되어야한다는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한번 그들의 남은 일생과 추억을 절단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더없이 잔혹하다. 진리에 가깝다고 믿었던 대의는 결국 절대적이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서 심장을 바쳐왔단 것인가.
리바이도 마찬가지다. 리바이는 극 중반부만해도 후임 병사들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정도의 인간으로 나온다. 앨빈과 에렌과 라이너와는 달리 명백한 목표나 삶의 진의 따위를 쫒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태어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칼을 잡았고 자신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척결하다보니 운명에 이끌려 조사병단에도 발을 들이게 됐다. 하지만 극 중반부를 넘어가 냉혈한이던 리바이의 의식을 흔들정도로 곁을 지키던 동포들의 희생 또한 도를 넘어간다. 리바이는 거인을 척결하며 수 많은 동료들의 희생 끝에 벽 너머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계속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살상극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이 살육의 끝은 무엇인지를. 이때까지만 해도 리바이의 머릿속은 목적보다는 의문투성이다. 그리고 대의를 위해, 사선을 넘나들며 지휘 체계를 공유하던 동료인 앨빈에게 꿈을 버리고 죽음을 택하라는 부탁을 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리바이의 인생의 목표가 새롭게 설정된다. 앨빈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는 인물로 변모한다. 동료들을 죽인 지크를 척결하겠다는 약속은 지크만을 찾는 미치광이에 가까운 면모를 만들어낸다.
심장을 바치는 건 조사병단 뿐 아니다. 모니터 너머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투한다. 목적이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았던 이 중 한명이기에 작품을 보며 말로 표현 못할 처절함과 무력감을 느꼈다. 셀 수 없는 회차들에서 조사병단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하게 스쳐지나간다. 인류의 적이 거인이 아니게 된 국면으로 전개가 변하는 순간, 이 숱하게 지나간 목숨들이 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상실감이 몰려온다. 그러던 중 앨빈이 살육작전의 미끼가 된 병사들을 지휘하며 우리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절규하는 병사의 질문에 답한다. 삶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남은 자들에게 그 의미를 맡긴다고.
진격의 거인은 실존주의의 문제를 정밀하고 생생하게 다룬다. '누군가에게 정의되는 삶과 내가 선제적인 정답을 부여하는 삶, 둘중에 무엇이 옳은 것인가?'
앨빈이 말한 후대에 의해 희생자들의 삶의 가치가 재정립 된다는 말은 실존주의와 대치하는 구조주의에 가까운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에렌은 이 구조주의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실존과 자유를 갈망하고 실행한다. 하지만 앨빈의 말이 옳은 것인지 에렌이 옳은 것인지 작품은 쉽게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 지크는 후대를 퍼뜨리고 생존하고 싶다는 생물의 이기심 때문에 이런 공포감과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공포감이 선행되기에 생존이라는 처절한 사투도 존재한다는 역설을 몸소 파라디섬의 아이들에게 실행했던 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명과 자유의지의 갈망에 대한 메시지를 의외로 아르민의 대답 한 줄이 단번에 관통한다.
에렌과 미카사 셋이 바다를 보러가자고 눈을 반짝이며 내 달리던 어느 노을 밑의 풍경을 떠올리며 아르민은 이 순간을 위해 내가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답한다. 그 순간 지크도 캐치볼을 떠올린다. 낭만과 위로를 선물해준 상대와, 그 당시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이 오가는 게임을 했을 뿐인 순간이 오늘날의 나를 지켜주는 발판이 됐음을 자각한 것이다.
진격의 거인이 주는 메시지는 다채롭다. 전쟁, 살육, 이기심, 정의, 선악의 교차 수많은 표상과 예시들이 흩뿌려지는 복잡다난한 세계관 속에서 그럼에도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건 스쳐지나가는 행복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 그 별것아닌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는 찰나가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결정해주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