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재희는 왜 그렇게 지난 날을 낭비했을까? 그러게 재희야. 한 4년 전의 내가 봤다면 너 왜 이렇게 막사니, 네가 소중한 걸 어떻게 그렇게 모르냐며 혀를 찼을 거다. 하지만 최근 몇년 간의 나를 보면 재희의 지난날처럼 나도 나를 놓고 살았다. 방향을 모르고 내 인생의 속도도 종잡을 수 없거니와 따라가기도 너무 벅찼다. 뭘 원하는 지를 찾는 과정이었기에 혼란스러워 뭘 해도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공허한 마음에 이것저것 다 해보고 먹어보고 깨지기를 반복했다. 가시 돋친 철심을 살점에 쥐어 피를 봐야만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내 마음을 알 것 같은 날이 있지 않나. 그렇게 재희와 흥수처럼 몇 년 간은 내 마음을 막 굴리고 살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세상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썼고 진심으로 대했고, 최선을 다해서 상처받지 않으려 했다. 마냥 상대방을 원망하자는 말은 아니다. 나도 온전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좀 부족한 구석이 있었다. 정신이 평소에 없어서인지 멘탈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조심성이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복구가 쉽게 안 되는 성격이라 상대방이 내 빈틈을 좀 먹을 구석을 쉽게 내어준 탓인가도 싶었다.
그래서 재희를 보며 눈물이 났다. 막 살 거라면 결과는 본인이 져야 한다는 건 안다. 병원을 가고 연인에게 바람을 맞고 헛소문에도 시달리는 상황들도 본인이 자초한 게 맞다. 그런 상황이 찾아온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사실 재희가 그렇게 사는 속내는 풀고 사는 오늘만 사는 애'라는 소문처럼 만큼은 자유롭지 않다. 나도 재희의 지난 삶을 재단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나를 모르고 인생을 모르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부딪히고 상처를 내면서 본인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니는 재희 속도 속이 아니었을 터다. 겉은 자기가 좋아서 저러고 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구석이 있을걸 알아서 급기야 신체적으로라도 상처를 내보고 싶은 거다. 피상적으로는 쾌락의 쫒음과 같은 양상으로 표현된 재희의 젊은 날의 몸부림은 자해와 같다. 인연을 함부로 만나고 에너지를 구태여 낭비해 봐도 불안은 부르트면 부르텄지 사라지지는 못 한다. 오직 흥수만이 그 불안과 미성숙을 다독인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흥수도 해결되지 않는 미완의 과제가 항상 그를 얽매고 있다. 재희가 흥수에게 한 말처럼 흥수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흥수는 스스로부터가 본인의 존재를 문제 삼고 숨기려 전전긍긍이다. 세상이 그를 욕할까 두렵다는 이유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서 모든 삶의 불안과 문제가 야기된다. 사실은 본인도 꽤나 슬프다. 세상이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슬퍼하도록 종용해야하니까. 급기야 미워할 수 없는 세상에서 제법 큰 존재를 맡고 있는 엄마에게서 '병'을 퇴마 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는 정말로 마음의 '병'을 얻어렸을지도 모른다. 본인을 부정하고 싶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본인을 등질까 무서워 먼저 등을 돌리고 상처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벽을 쌓으며 매사에 회피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그놈, 나랑 사랑이라도 하려고 하는 모양이야"
흥수라고 수호가 진정한 사랑인 줄 몰랐을까? 사랑 같은 것을 하게 될까 봐 께름칙하다며 너스레를 떨다가 나랑 사랑 같은 것을 하겠다고 다가오는 것 같다며 질색을 했다가 결국 그 무한한 마음과 시간들에 무너진다. 사랑의 크기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진 것이 아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 사랑에 기꺼이 마음을 기대고 싶었을 거다. 숱한 혼란과 성숙의 시간들을 지나 흥수는 결국 용기를 내고 변화했다. 하지만 모든 현실이 그렇듯 시간은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존재를 붙잡아두지 못한다. 재희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성숙하는 동안 흥수도 고민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흥수는 구부러지지 않는 성격의 재희에게 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대로 살기를 힘껏 북돋는다. 재희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눈치를 보는 흥수에게 더는 숨지 말라고 너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며 소리친다.
상처받기 전에 본인이 곁을 내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자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 세상으로의 창문을 열 용기와 여유가 싹트게 된다. 나대로 사는 재희를 보며 자신감과 해방감을 느끼며 본인 나름대로도 '나'를 고수하려 군데군데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세상에 본인을 문대면서 기어이 상처를 입어가면서 부딪히는 재희처럼 본인을 내던진다는 개념을 조금씩 본인의 방식대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글을 놓지 않는다거나 세상에 깎여가는 재희를 너답지 못하다며 일깨워 준다거나.
두 인물은 세상과 타인들에 과하게 시니컬하다. 하도 질려버려서 포기한 것처럼 보여도 새로운 이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주게 되고 보이게 된다. 그러다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은 일을 겪고 인간을 보면 구역질이 나다가도, 나 또한 세상과 타인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순간이 없지 않기에 그러려니 한다. 나도 내가 완전하지 못함을 안다. 그렇기에 또 흔들릴 때도 있다. 내가 내박쳐져 있을 때 든 나를 놓고 막 살아갈 때든 정처 없이 살아갈 때든 어떤 상태의 나를 받아들여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일어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구실 좋은 말들로 내게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것도 많이. 그들은 가족일 수도 잠깐 스쳐가는 이들일 수도 내가 소중하는 여기는 이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조금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틀에 맞춰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했다고들 한다. 그래서 이따금은 그 말을 한 상대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그 말에 나라는 존재를 덮이게 만들고 나를 지우도록 허락한다. 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거나 그런 잣대에 부합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면 돌이킬 수 없다. 본래의 나는 버려진다. 타인과 세상이 바라는 이상에 날 맞추면 그들에게 영원히 사랑받을 수 있을까? 기준과 정의는 시간의 흐름에 예속된다. 상대방과 세상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살아라 할 것이지만 보편적인 윤리기준 지키고 내 본분과 할 일만 잘한다면 우리는 그냥 우리대로 살아도 된다. 모두에게 사랑을 바라는 건 욕심이지만,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다독여주는 딱 한 명이 있는 것만으로도 결국은 괜찮아지고 결국은 일어날 수 있다.
재희와 흥수는 이따금씩 타인들에게 존재의 올바름을 질문받는다. 존나 이상한 세상에서 존나 이상해지는 방법을 택하고 상처받지 않으려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은 여느 청춘의 모습을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으리.
<대도시의 사랑법>은 말한다. 미치지 않으려니 특이해지는 법을 택한 순간도, 이러한 선택으로 상처받고 채이는 순간도 다 나라고. 그 이상해 보이는 이 순간도 나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남들 눈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하나도 안 이상해요. 우리가 이상해?
야, 너네 진짜 잘 살고 있어. 오늘을 살아가는 흥수와 재희에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