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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Jun 09. 2020

부뚜막 고양이가 임신했다.

나는 임신한 고양이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우리 집 오코씩이는 수컷이라고는 만나본 적도 없이 다 중성화 수술부터 했기 때문. 본가의 아파트 고양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늘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기에 임신한 고양이가 얼마나 배가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부뚜막 고양이 배가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임신한 고양이를 본 적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새끼 가졌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근데 부뚜막 고양이는 엄청 늙어 보이는데 저렇게 늙은 고양이가 임신을 할 수 있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고양이 커뮤니티에 질문을 했다.


고양이는 몇 살까지 임신할 수 있나요?


세상에 답변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고양이는 죽을 때까지 임신을 할 수 있단다. 그래서 노묘들은 임신과 출산 때문에 죽기도 한다고. 안돼!



차라리 내가 주는 밥을 먹고 살이 찌는 거라면 좋을 텐데.

처음에는 꾸질꾸질한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밥을 주기 시작했는데. 밥도 좀 먹고 비타민도 좀 챙겨줬더니 그래도 최근 들어 털은 좀 반질반질해졌다.


어려서부터 마당냥이들의 출산을 많이 본 남자 친구에게 부뚜막 고양이 좀 봐달라고 채근했다. 남자 친구는 무슨 그렇게 늙은 애가 임신이냐며 창문으로 가더니. 어 정말 임신했네.


헐! 정말?

응 배가 저만큼 나왔잖아. 저건 새끼 가진 배지.


세상에 진짜 임신이라니. 이 더운 날씨에. 자기 몸도 성치 않아서 힘없이 다니는 애가 새끼까지 낳아서 키운다고? 너무 불쌍해.



부뚜막 고양이의 임신을 알게 된 후로 괜히 더 마음이 쓰였다.

출산을 하다 죽는다는 댓글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뭘 해주면 되지. 차라리 죽지 않고 새끼라도 무사히 낳으면 TNR이라도 해줄 텐데.

구청 홈페이지에서 길고양이 TNR 민원을 검색하고, 안내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길고양이 TNR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지금 신청하면 120번이란다. 네? 120번이면 언제쯤 중성화할 수 있나요? 그건 자기들이 순서대로 연락을 주는 거라 모른다고. 올해 안에 연락이 안 가면 내년에 다시 신청하란다.

그럼 일단 신청은... 하지 뭐. 전화받은 분께 내 이름, 연락처, 주소, TNR 할 고양이 수를 말하니 간단하게 신청이 되었다.


120번이라니. 그래 그래도 구청에서 길고양이들 무료로 중성화해주는 게 어디야. 한편으로는 기다리다가 부뚜막 고양이가 임신을 두 번은 더하겠다 하는 이기적인 마음도 들었다.

참. 내가 구조해서 중성화할 용기도 능력도 없으면서 누굴 탓한담. 



부뚜막 고양이는 여기에 오면 밥을 준다고 생각했는지 거의 매일매일 우리 집에 왔다. 나와 눈이 가장 마주치는 현관 쪽 창문 앞에 앉아서 내가 창문 커튼을 걷으면 나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너도 참.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 자꾸 밥 먹으러 오는 거니.


이 동네에 캣맘도 많고 밥자리도 많은데 자꾸 구석진 우리 빌라까지 오는 걸 보면 영역에서 자꾸 밀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나이 많은 고양이니까.

나를 의지하면서도 마음을 완전히 열지는 않는지 내가 밥을 주려고 현관을 열면 화분 뒤로 쪼르르 도망간다. 다시 집으로 와 자리를 피해 주면 주변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


요 근래에는 아예 우리 집 현관 앞에 누워서 나를 기다린다.

눈이 마주치면 밥을 주는 것이 부뚜막 고양이와 나의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다.



밥이 남으니까 파리도 꼬이고, 개미도 꼬이더라. 그래서 딱 한 끼 먹을 만큼만 부어주는데 가끔 모자라면 앉아서 나를 또 쳐다본다.

더 달라고? 그래 줄게 줄게.

사료통을 들고나가면 또 화분 뒤로 쪼르르 도망가 숨는다. 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와서 모자란 양만큼 먹고 훌쩍 어디론가 가버린다.




요 며칠은 아예 우리 집 앞에 누워서 쉰다. 너 현관 앞에서 뭐하니 하고 창문을 열면 놀라서 또 화분 뒤로 쪼르르 도망간다. 대범한 것 같은데 은근히 소심 하단 말이지.

딱 벽 하나만큼. 부뚜막 고양이가 나에게 허락한 거리는 하나만큼의 거리인가 보다.


구내염 때문에 사료를 힘겹게 먹는 게 마음이 아파서 간식에 약을 섞어줬는데 약은 다 뱉어버렸다. 흠. 너도 쓴 건 싫구나? 그냥 비타민이나 다시 열심히 줘야겠다.

배가 빵빵해졌던데. 곧 새끼를 낳으려나. 임신한 고양이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안 죽고 오래오래 우리 집에 출석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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