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악연이라는 만남

관계에 대하여

by 변송자

이 세상에 던져진 나는

이미 있었던 것들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선택하기 전, 그것들의 일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과 환경이 먼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부모와 형제자매,

스승과 친구,

동료와 상관, 배우자.

그 이름들 속에는

만남의 방식과 기대의 방향이

이미 함께 들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어느 순간

그 만남에 이름을 붙인다.

인연이라고,

혹은 악연이라고.


나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아니면 내 기준 즉,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통과시키는 걸까.

인연이라고 부른 관계와

악연이라고 밀어낸 관계 사이에서

문득 그런 궁금증이 생겼다.


살아가다 보면 늘 좋은 사람이 있다.

첫인상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알아가는 과정도 무리가 없고,

한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다시 마주해도

관계의 온도가 그대로인 사람.

그런 만남은 ‘인연’이라는 말로 기억된다.

함께했던 시간의 따뜻함은

지금 곁에 없더라도

온기와 향기처럼 남아

없지만 있는 무엇으로

나를 채워 준다.


반대로 처음부터 어딘가 어긋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생각과 표현의 결이 자꾸 비껴가고

대화가 편안하게 흐르지 않는 관계.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말한다.

“나와는 결이 다르구나.”

그리고 애써 맞추려 하기보다

적당한 거리를 둔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 단순한 판단의 기준은

상대를 알아보기도 전에 재단하기도 함으로써 오히려 나를 먼저 지치게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불편함이 올라올 때마다

판단 대신“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는 편이다.

이 문장은 이해의 선언이 아니다.

내 감정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하나의 선택이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지키기 위한

마법 같은 주문에 가깝다.


우리는 살아가며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과 상황을

생각보다 자주 만난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를 이해한다는 일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건네는 "이해한다"는 말은 위선에 가깝다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가장 사랑한다고 믿는 가족 사이에서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때로는

“나는 당신이 불편하다”는 고백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를 달랜다.

“그럴 수 있지.”

“사정이 있겠지.”

이 말들은 상대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움으로 기울지 않게 붙드는

손잡이 같은 문장이다.

물론 이런 태도는

이해라기보다 거리 두기에 가깝다.

거리를 두면 상처는 줄지만

애정과 관심도 함께 멀어진다.

그 점에서 보면

이것은 이해가 아니라

조용한 밀어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면,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미워하는 감정조차

사실은 아직 관계의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진짜 무관심은

미움조차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의 어긋남이

서로에게 상처로 되돌아오는 관계라면

한 번쯤은 멈추어 물어야 한다.

이 관계는 건강한가.

양쪽 모두에게 애정으로 느껴질 수 있는가.

한쪽만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말하면서

그 말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본다.

어쩌면 인연과 악연은

이미 정해진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내가 붙이는 해석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만남은 일어나고

관계의 이름과 의미는

오롯이 내가 부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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