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물을 주는 장미꽃은 있어.
"네 장미꽃을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의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20년 전의 저를 떠올립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촘촘하게 시간표를 짜고, 그 시간이 아이를 가장 찬란한 꽃으로 피워낼 것이라 믿었던 엄마였습니다. 저는 아이의 시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성 어린 시간들이 사실은 아이의 세계가 아니라, 제 욕망의 화분을 채우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내담자들도 종종 비슷한 덫에 걸려 있습니다. 상대가 내게 가하는 정서적 통제를 '관심'이라 믿으며, 불편함을 느껴도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에 무력해지는 모습들입니다. 그들은 상대의 말에 맞춰 자신의 생각마저 디자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각자의 시간과 마음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그 투자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관계의 결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진정한 길들임은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물 주기'입니다. 반면,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세계를 나의 욕망이라는 화분에 가두려는 '통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게 한 번 더 묻고 싶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들이는 그 귀한 시간은, 그 사람의 세상을 꽃피우기 위한 물 주기인가, 아니면 나의 화분에 가두기 위한 울타리를 치는 일인가?
나라는 존재의 결핍을 상대라는 거울에 투영할 때, 우리는 상대를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내 불안을 잠재울 도구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이라 착각하며 저지르는 가장 흔한 오류입니다. 아이를 내 뜻대로 디자인하려던 제 욕심도, 내담자들이 상대에게 매달리는 의존도, 결국은 '상대를 내 곁에 잡아두어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불안이 빚어낸 그림자였습니다.
물론, 이 불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아이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압니다. 그 불편함이 올라오는 순간, 아이에게 조언하거나 상황을 통제하려 드는 대신 '아, 지금 내 안의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드는구나'라고 제 상태를 먼저 체크합니다.
우린 이제 부모와 자식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삶을 디자인하고 책임질 수 있는 독립된 성인입니다. 건강한 관계란 너무 밀착되어 서로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이 드나들 수 있는 틈을 마련해 주는 것임을 기억하려 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 관계 속에서, '불안'이 운전대를 잡고 있지는 않나요? 때로는 상대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고, 나라는 화분의 결핍을 먼저 돌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