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조용했던 카톡이 울렸다
평소 조용하던 카톡이 울렸다.
"조만간 날을 잡아 나들이를 한번 갈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용수 형님이었다. 현재 범계에서 모모네국수집을 운영하시는 용수 형님.
처음에는 당연히 사장님이란 호칭을 썼지만 언제인가부터 형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7년 전 아내와 함께 평촌 먹자골목의 한 국숫집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그리고 주먹밥을 시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언젠가 왔을 손님들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었고 한편에는 커다란 세계전도와 함께 사장님의 자전거 여행 루트가 표시되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치국수 한 사발과 시뻘건 비빔 국수가 식탁에 올려졌다. 국수 한 젓가락을 크게 집어올리고 후후 불어 후루룩 먹었다. 나는 미식가가 아니다. 섬세한 맛의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이 없다. MSG에 완전히 길들여진 초등학생 입맛을 가졌다. 나의 맛 평가는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맛있었다'. 두 젓가락째에는 더 맛있었고 세 젓가락째에는 더더욱 맛있었다. 벽면에 붙은 세계여행 전도가 맛을 돋우는 비책이었고 자그마한 주방에서 짧은 머리에 두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국수를 마는 심야 식당 마스터 같은 사장님의 실루엣은 맛의 화룡점정이었다. 식당의 느낌은 맛을 느끼는 나의 중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곳에서는 어떤 국수를 내놓아도 맛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 당시 마흔을 앞둔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직장에 지나치게 얽매인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적당히 벌어 잘 사는 삶에 대한 고민이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던 시기였다. 태풍의 한 가운데에서 태풍의 눈과 같은 평촌의 작은 국숫집 '작은 국화'를 만나게 되었다. 종종 들렀고 사장님에게 건넸던 한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열 마디가 되었다. 어느 날 국숫집 영업이 끝나는 시간 즈음에 사장님과 차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시커먼 남자 둘이 차 한잔 앞에 두고 그리 오랜 수다를 떨게 될 줄은 모른 채 말이다. 평범하지 않은 사장님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퇴사를 했다. 적당히 벌어 잘 사는 삶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행동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만 영원할 것 같았다. 두려움에 맞불을 피우기 위해 내게 힘이 되어줄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났다. 돌이켜보면 국숫집 용수 형님은 크게 힘이 되어준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용수형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형님 무조건 오케이죠!"
답을 했다.
"이웃사촌도 같이 갈 거예요."
평촌에서 살았던 우리는 산본으로 이사를 갔었다. 산본 집으로 용수 형님을 초대했었는데, 이때 이웃사촌도 함께 왔었다. 형님과 같은 단지에 사는 이웃분이라고 한다. 나이대가 우리 부부와 같다.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말이 잘 통한다. 놀라운 건 이분들도 용수 형님의 국숫집 손님으로 인연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역시나 용수 형님, 심야 식당의 마스터였다.
친구 혹은 이웃이 있다. 이 관계가 의미 있는 관계가 되기 위해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빈번한 만남? 연락? 대화? 나는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공감대가 있다면 잦은 연락과 만남이 없어도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산본에서의 첫 만남 이후, 7년 만에 양평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00시 10분,
개군면 보리밥집에서 저녁을 사 먹고 들어와, 7시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수다를 떨었다. 유재석이 그랬다. 통하는 대화는 술 없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다고 했다. 차 한 잔과 손님 온다며 오래간만에 쿠키 공장을 돌려 생산해 낸 쿠키 한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5시간을 쉼 없이 떠들었다. 손뼉 치고 크게 웃고, 늦은 시간까지 이럴 수 있다는 건 주택만의 특권이다. 가벼운 대화로 시작해 무게감 있는 대화까지 서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느 것도 정답일 수 없는 세상살이에 서로의 삶을 존중해 주고 경청해 주는 대화는 피곤하지 않으며 힘이 된다. 늦은 시간, 육체적으로는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만하다.
이것이 바로 대화의 희열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