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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바비앙 Aug 09. 2020

 코로나 극복하기-나를 나답게 하는 것.

다시 시작

뜬금없이 공모전 글을 써 보겠다고 컴퓨터를 열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만으로도 기적인 내게 공모전은 꿈도 못 꿀 일인 줄 알면서 쓰게 된 건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라는 주제가 내가 살고자 글을 쓰게 된 이유와 어쩐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써 본다.




‘나답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별 고민 없이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누구나 그렇듯 미혼인 시절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별 제약 없이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나와는 잠시 안녕!!

나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이다.


현재 코로나 때문에 심적, 물질적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 덕분에 ‘나’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큰 아들(우리 아빠) 이 내리 딸 셋. 작은아들( 작은 아빠) 딸 둘, 아들 하나 없는 손이 귀한 집( 우리 할머니는 다 쓰잘 떼기 없는 것들이라 하셨다.)의 첫째 딸은 곧 장남이랑 같은 의미다. 나는 그런 집의 든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첫째다. 첫째라는 타이틀은 나를 일찍부터 철이 들게 했던 것 같다.

동생들한테 양보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무엇을 하든지 타에 모범을 보이는 행동을 해야 했다.

게다가 아빠는 우리 동네 중학교 선생님 이셨다. 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은 나를 알았기에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레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주변 환경이 나를 더 ‘모범생’이라는 동굴로 몰아넣었다.


어른들 말씀에는 무조건 예스.

수업시간에 딴짓 금물, 숙제나 준비물을 안 챙겨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밤을 새워서라도 내게 주어진 할 일은 다 해 놓기.

무더운 여름날에도 긴바지와 남방의 단추는 하나라도 풀어놓으면 안 됨.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떠들거나 간식 사 먹지 않기.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기 등등등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씩 해 볼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이 나에겐 절대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건 내가 첫째니까 , 다른 아이들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선생님 자식이니까 당연히 수행해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내게 강요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나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님이다. 나의 성향은 아이들 한테도 그대로 투사되었다. 

피아노만 치고 가는 게  다 가 아니었다. 피아노를 열심히 가르쳐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예의범절, 생활태도까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깐깐한 선생님이다. 내가 한자리에서 20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나만의 지독스러운 책임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코로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나의 일은 탄탄대로였다. 1~2주만 휴원 하면 괜찮을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갑자기 쫓겨나듯 수업을 중단한 채 두 달을 쉬어야 했다. 엄마 마음으로만  생각하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문을 열어봤자지만 운영자의 입장으로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해야만 했다. 

두 달을 쉬고 조심스레 수업을 재계하겠다고 했을 때 학부 형님들은 나를 걱정해 주셨다. 몇 달 전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별개다. 고학년의 주요 과목도 아닌 피아노는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서 굳이 보낼 필요가 없는 요소이다.

그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신입생 한 명도 없이 새 학기를 맞이 했다. 기존의 아이들도 안전의 문제와 더불어 고학년이 되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6월이면 상가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기존의 원생이 반 이상 줄었는데 운영을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 그만두라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정하라고... 이 상황이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누구 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런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중교통도 갖춰지지 않았던  20년 전, 버스 종점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와야 했고, 혼자 일 했던 나는 아이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늦게까지 수업을 해야 했다. 

그만둬도 오며 가며 들러서 놀다가는 아이들, 초등학교 때 나를 만나 서른이 훌쩍 넘어 다시 찾아온 아이, 

피아노 치는 걸 그렇게 싫어했는데 전공으로까지 마음을 바꾼 아이, 대학생 때 취미로 배웠다가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니 그 아이를 보내겠다고 찾아오는 성인 제자, 이사를 갔다가 세월이 흘러 옛 동네를 지나쳤는데 간판이 그대로 인 것을 보고 들어와 봤다가 내가 있어서 화들짝 놀라며 맞이했던 꿈같은 재회. 

이곳에서의 20년은 내 청춘의 역사이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 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때도 있었고,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해 얻은 위장병과 매일 큰소리로 떠들어야 했던 목은 성대결절이라는 병을 안겨주었다. 

20년 동안 공식적인 휴가 외에는 맹장수술로 1주일, 결혼할 때 1주일, 출산으로 3주 그것이 휴강의 전부였다.

내가 아픈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해도 눈물을 머금고 악착같이 수업을 했을 만큼

나의 일은 언제나 1순위였다. 


도저히 학원을 정리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이 시국에 답답한 마스크를 하루 종일  쓰면서, 수시로 손 소독제를 바르며 그래도 배우겠다고 앉아있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눈에 밟히고, 사정이 있어 잠시 중단하는 상황을 너무 미안해하는 엄마들의 그 고마운 마음이  너무도 진실하게 와 닿아 차마 그만두겠다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일에 대한, 내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예의는 표시하고 싶다. 


결정을 해야 할 6월이 훌쩍 지나고 8월인 지금,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마음의 결정을 했을 때 주변에서 그랬다. 


"너 답다."

"너도 참 대단하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깟 책임감이 밥 먹여주냐고 성화이지만 그 책임감이 '나 답게'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어떤 결과가 나와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답게 행동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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