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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바비앙 Jan 13. 2021

벼락 거지가 되었습니다.

일상의 더하기 빼기

벼락부자는 알겠는 데 벼락 거지는 뭘 뜻하는 걸까?

무심코 인터넷에 뜬 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망했다는 뜻으로 쓴 건지 고개를 갸우뚱하면

마우스를 클릭해봤다.


"하하하"


벼락 거지는 바로 나였다.

 

아파트값이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눈만 뜨고 나면 올라가다 보니 아파트가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과의 재산 차이가 엄청 날 수밖에 없어졌다. 갑자기 대한민국에 돈 많은 사람이 넘쳐나게 되는 건지, 아니면 지금 팔아서 현금으로 쥐고 있어야 부자인 게 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아파트 한채 가지지 못한 나는 세상이 미처 돌아간다는 말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결혼할 때 시댁에서 도움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친정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친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냥 공평하게 아무 도움 없이 우리끼리 출발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연애 한번 못해본 큰 딸이 혹시 시집 못 가고 처녀귀신이 될까 봐 내심 불안해하시던 부모님은 ( 딸 셋의 장녀인 내가 제일 늦게 결혼을 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한지 일 년 남짓만에 남자를 데리고 오니 기뻐하셨다. 그러나 예비 사윗감의 직장도, 그를 뒷받침하는 배경도 기대 이하였기에 적잖이 실망하셨으나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 젊고 건강하니 열심히 일하면 되는 거라며 딸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군에서 늦게 나온 남편은 사회생활의 출발이 늦어 좋은 직장으로 가기 힘들었다고 했다. 적은  월급이라도  돈 관리 야무지게 하는 성격이었으면  (살아보니 알겠더라.)조금이라도 모아둔 돈이 있었을까?

나 역시  이른 나이에 내 사업장을 꾸리면서 아빠의 퇴직금을 담보로 돈을 빌렸기에 다달이 나가는 대출금과 화련 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겠노라 써댄 돈도 있어서  모아둔 돈이 많지는 않았다.


용감하게 몽땅 대출을 받고 방 하나인 원룸에서 시작했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아이가 생겨 엄마 옆으로 다시 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주인이 전세금을 3천만 원이나 올려달란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쫓겨나듯 고향으로 컴백해야만 했다. 엄마 집에서 최대한 가까워야 하고 더 이상의 대출은 필요 없는 집으로 골라야 했다. 다행히 원하는 조건은 쉽게 맞출 수 있었다.


중소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아이가 첫 돌이 되던 그달에 대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여태 월급 외에는 그 어떤 돈도 추가로 들어온 적이 없었거늘 대기업으로 가니 월급도 오르고 복지라는 혜택도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의 이전의 월급으로 최대한 맞춰 생활하려고 애썼고, 월급 인상의 차액분은 당연하고, 연말정산 환급금까지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통장으로 집어넣었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학교에 갈 때쯤이 되자 이사가 가고 싶었다. 어릴 시절 부유하게 살 진 않았지만 혜택 받는 첫째로 일찍부터 내방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컸는데 내 자식은 그렇게 못 키우고 있는 게 싫었고, 넓고 세련된 아파트 거실에 아이를 위한 인디언 텐트 하나 놓아주지 못하고 키운 게 속상했다. 입학 선물로 자기 방에 책상도, 침대도 놓아주고 싶었다.


그 무렵 다른 동네에 사는 동생이 퇴사를 하고 옆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그 몸값 높으신 아파트를 사서 왔다. 동생이 잘 사는 건 배 아프지 않았지만 동생보다 못 산다는 씁쓸함까지 없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사가 가고 싶었던 제일 큰 이유는 동생과 비교되는 생활이 싫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모아둔 돈을 탈탈 긁어모았더니 아파트는 안 되겠고, 동네에 신축 빌라는 조금만 대출을 받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지중지 키운 큰 딸이 아등바등 사는 게 늘 안쓰러웠던 아빠는 빚내지 말고 아빠가 나머지를 보태 줄 테니 그냥 동네 새 집에서 살라고 하셨다.

여태 빚 갚고 돈 모은다고 흔해빠진 차 한 대 못 굴리고 살았던 나도 대출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집이라는 게  나 편하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아파트의 미련을 버렸다. 여기서 살면서 돈을 좀 더 모아 다음번에 아파트를 가겠노라 다짐했다.



원하던 대로 아이 책상과 침대를 사주었다. 그 사이 남편은 또 한 번의 이직으로 연봉을 높였다. 돈이 더 생겼었도 내 삶은 여전히 열심히 모아야 했다. 다음번엔 아파트를 사야 했고, 아빠가 준다고는 하셨지만 갚고 싶은 빌린 돈이  있었기에...


연세가 많으신 홀 시어머니가 늘 신경 쓰여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의 돈과 모아 놓은 돈, 그리고 얼마간의 대출을 받아 우리 집  근처의 소형 아파트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동산은 일도 모르는 부린이 부부는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나름대로 절약하면서 열심히 모아 내 힘으로 집 한 채 마련했다는 기쁨을 오래 누리지도 못 한 채,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허탈해졌다. 그리고 뼈를 때리는 한마디.


벼락 거지!!!


가진 게 많지는 않아도 없다고 생각하진 않고 살았는데 이 한마디가 나를 졸지에 거지로 만들어 버렸다.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나서 현금을 주고 아이패드를 사 버렸다.  

노안이 와서 안경도 다초점 렌즈로 바꿔야 했는데  원래도 비싼 렌즈에 안경테까지 비싼 것으로 골라 현금으로 시원하게 질렀다.

그러고 나서는 좀 더 저축할 부분이 없나 가계부를 살피는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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