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더하기 빼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갑’과 ‘을’이라는 단어. 이들 사이의 묘한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한자의 십간에서 첫 번째인 ‘갑’과 두 번째인 ‘을’, 이들의 순서를 빗대어 둘의 관계에 있어 유리한 쪽을 ‘갑’이라 칭한다.
일을 하는 데 있어 나의 위치가 갑인지 을인지 따지는 게 우습지만 굳이 소속을 따져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을’이라 대답한다. 간혹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하면서 ‘내 수업 시간이니 내 말을 따라야 한다’ 고 으름장을 놓으며 ‘갑’인 행세를 할 때도 있지만, 그 아이들이 선생님이 싫어서 못 다니겠다고 하면 영락없는 ‘을’의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나의 일이다. 내 자식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다면 진작에 등짝 스매싱을 날렸겠지만 고객님을 상대로 그랬다가는 큰일이 나기에 최대한 친절한 미소로 타일러야 한다. 온갖 부당한 요구에도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를 연발하며 수화기에 대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때도 허다한 나는 절대적으로 ‘을’이다.
아주 오래전 엄마 손을 잡고 온 아이가 있다. 제법 똘똘해서 알려주는 대로 잘 따라 해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다니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잘 지내고 있는 아이가 믿도 끝도 없는 말을 전하니 내가 뭘 잘 못한 게 있나 싶어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머님께 여쭸더니 학교에서 관계가 안 좋은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함께 있어서 싫다고 한단다. 본인은 아이의 요구가 아주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다 들어주는 편이라고 했다. 이유는 납득되었지만 왠지 의문의 1패를 당한 듯했다.
아이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남모를 속앓이를 하게 만들었다. 내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를 들고나갈 때면 다시는 받지 않겠다는 소소한 복수심도 스쳤다. 다시 오겠다는 연락이 오면 마음이 약해져 받아주고는 ‘이번엔 그러지 않겠지’라는 기대를 품었다가 역시나 뒤통수를 맞는다. 마지막 이겠거니 생각하고 간 때가 초등학교 5년이었으니 더 이상은 이 같은 반복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선생님~ 요즘 수업하시나요? 우리 00 이가 집에서 개인 레슨 받고 있었는데 지겹다고 학원으로 하고 싶다네요.”
아이들 개학이 다가오니 시간표를 좀 봐야 해서 나중에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중학생이 되어도 아직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또 얼마나, 무슨 이유를 대고 나갈까 싶은 게 지난날이 생각났다. 아이가 나갈 때마다 찜찜했던 기분을 이제는 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가능한 아이들을 분산시켜야 하니 자리도 여의치 않다. 예전 같았으면 퇴근시간을 늦추더라도 받아줬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지 말자’는 마음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 어머니~ 죄송해요. 자리가 없네요. 시국이 이렇다 보니 지금은 좀 어렵겠어요.”
늘 ‘예스’를 듣다 ‘노’를 들어서 였을까,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자리가 나면 연락을 달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코로나로 인해 수강생이 반토막이 난 지금, 누구라도 온 다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반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갑질을 한 이유는 ‘을’이 외치는 작은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까. 내 돈 내고 배우는 사교육,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옮길 수 있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 그만둔다면 깨끗하게 수용하고 개선점을 찾으려 노력하겠지만 갑의 입장으로 ‘ 내 마음’을 무기로 삼아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하는 행동은 지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늘 하고 싶었던 말을 직접 내뱉으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다시 전화해 오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개운한 마음이 아님에도 나의 행동에 편을 들자면, 일을 시작한 지 22년 만에 처음으로 해 본 갑질은 ‘이유 있는 외침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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