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흔적
나뭇잎만 스쳐도 까르르 웃음 짓던 시절에 만나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골골 거리를 체력과 늘어나는 뱃살만큼의 세월을 같이 하는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전업주부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 성전에 있는 '꽃꽂이' 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꽃'과의 관련은 사돈의 팔촌도 없던 그녀가 어떻게 그 일을 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봉사'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취미를 찾은 것 같아 보였다. 워낙 약골인 그녀이기에 꽃꽂이를 하고 온 날 이면 물을 잔뜩 먹은 솜뭉치 마냥 늘어져 있다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조금 하다가 못 하겠다고 백기 투항을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하는 것은 물론 따로 비용을 들여 꽃꽂이를 배우고 자격증 시험도 보지 않겠는가.. 이렇다 할 취미가 크게 없어 보였던 그녀에게 생활의 활력이 되는 것 같아 보여 보기 좋았다.
" 나 방통대 농학과에 원서 넣었어 "
" 갑자기 웬 농학과?"
경제학과 출신의 그녀가 갑자기 농학과에 원서를 썼다는 말에 시골에 가서 농사 지으려고 거기를 지원했냐며 크게 웃었다. 농학과에 문을 두드린 건 다름 아닌 '꽃' 때문이었다. '꽃'기사 자격증 1급을 따려면 관련 직종에서 일한 경력이 3년 이상이 되든지,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중년의 아줌마를 써 줄 것이며, 설사 운이 좋아 일을 한다 치더라도 1년도 아니고 3년씩이나 해야 하는 건 그냥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 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방통대'였다. 새 책에 노트와 필기구까지 장만한 그녀는 다시 스무 살이 된 듯했고, 그런 그녀에게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 나 그만둘까 봐"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제 한 달? 그럴 거면 뭐하려 갔냐?"
학점만 딸 생각에 3학년 편입에 전공 필수 만 신청했더니 도대체 무슨 말인 줄 알아들을 길이 없는 데다가 리포트는 4개나 내야 해서 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며칠을 새벽 3시까지 교과서와 씨름했더니 다음날 기력이 딸려 혼이 났다고 했다. 맨날 무언가를 배우고 숙제를 해야 해서 잠을 못 자고 있다는 내가 생각이 나더란다.
"너는 어떻게 그 많을 걸 다 했니?"
작년에 코로나로 일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제2의 사춘기를 맞은 나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두려움과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차 몰라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고만 있었다. 몇 개월을 울고 나니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 나 자신에 관한 글쓰기'였다. 글이라고 해 봤자 일기장에 몇 줄, 가끔씩 쓰는 블로그 포스팅이 전부였던 내게 'A4 용지에 글자 크기 10포인트, 줄 바꿈 없이 매일 한 장씩 써낼 것'이라는 규칙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내가 미쳤지, 내 돈 내고 이걸 뭐하러 신청을 했을까' 골백번 머리를 쥐어박으며 후회했지만 '글쓰기로 치유를 하고 싶은 분'이라는 모집 문구는 차마 내 발로 갈 수 없었던 정신병원 문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한 달의 시간이 흘렀고, 한 자도 못 쓸 것 같은 종이에는 작은 소책자 분량 정도로 나의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 쓰는 내내 다시는 글쓰기를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신기하게 다 끝내고 나니 나의 형편없는 문장력이 부끄러웠고, 좀 더 매끄럽게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독서모임을 비롯 서평 쓰기, 블로그 쓰기 챌린지, 마인드 맵 등 무언가 읽고 생각하고 쓰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뿐 이던가? 내 인생의 다음을 찾아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무슨 자격증이라 이름 붙여진 것 중 내가 해 볼만 하겠다 싶은 건 무조건 신청을 해 악착같이 수업을 들었다. '자격증'은 한낱 종이에 불과하다는 것도 모른 채 그것만 있으면 나도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업을 멈춘 것이 아니기에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을 2-3시간밖에 주지 않으며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 내 몸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이렇게 잠깐 배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 건지, 시간이 지나 괴로움이 무뎌진 건지 마음의 고통도 옅어지고 나니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타났다. 손등에 마치 '대상포진'처럼 붉은 수포가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보기에도 흉측하지만 가려움과 따끔거림, 가끔은 전기가 오는 듯 찌릿함은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대상 포진은 아니었지만 수면 부족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로 생긴 병이었다. 이미 1년은 넘은 수면 패턴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기에 수면제를 복용하며 수면 패턴을 되돌려야 했다. 더 이상 수면제 복용은 하지 않지만 약으로 가라앉힌 수포는 조금만 힘들다 싶으면 여지없이 올라오기에 여전히 관리 중에 있다.
SNS 공간 상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차라리 나의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그러나 현실의 가족들이나 친구들한테는 마음 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못나게 구는 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대략을 알고 있었지만 지난 시간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속속들이 알지 못했던 그녀는 나의 스토리를 듣고 놀라워했다.
" 너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던 건 간절함이었구나! 내가 지금 관둘까 고민하는 건 그만큼의 간절함이 없어서 인 것 같다."
통화를 끝내고 여운이 남은 말은 '간절함'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나에게도 '간절함'이 부족해 여태 갈길을 정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리고만 있는 걸까? 아니면 치열하게 찾고 있다는 것이 한낱 호기심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에게 ‘ 간절함’ 이 남아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