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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하나 사면 안 잡아먹지

by 백수광부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 매체인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하여 맑고 고운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한 편의 비디오가 사람을 바꾼다.

유튜브의 바다를 돌아다니다 알고리즘이 이끈 영상을 보았다. 영상이라기보다는 음악만 흘러나오는 콘텐츠였다.



차이코프스키 4번 교향곡 연주다. 벼락처럼 내리꽂힌 연주였다. 대체 누구의 연주란 말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클래식은 잘 알지 못해 아는 정보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유튜브 영상을 올린 이가 적어놓은 설명 덕에 벼락처럼 머리에 꽂힌 음원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영상에 적힌 대로 구소련 및 러시아의 지휘자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이끄는 소련연방 국립교향악단(USSR State Symphony Orchestra)이 도쿄 산토리홀에서 1990년도에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실황 연주다.


마침,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이 없었기에 하나쯤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었지만 음반을 구매하려니 난관에 부딪혔다.

스베틀라노프는 Pony Canyon 레이블에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을 두 번 냈다. 하나는 위 음원의 1990년 실황 연주이며, 또 하나는 1993년의 연주다.

음반을 구하려면 Pony Canyon 레이블의 90년 전집이나 해당 전집을 재발매한 Exton 레이블의 음반을 구매해야 했다. 그러나 신품은 없고 중고가는 국내외 모두 정가의 몇 배였다.

H 모 샵에서 정가로 구매 시도가 가능했지만 음반이 매장에 입고되지 않아 자동으로 주문이 취소됐다.

정녕 몇 배의 가격을 주고서라도 구매해야 하는가.

온라인 음반 샵을 습관처럼 드나들기를 몇 개월, H 모 샵에 운 좋게도 재고가 들어와 음반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스베틀라노프는 2년 후인 1992년, 소련연방 국립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했다고 한다.

내한한 해는 빼어난 솜씨로 나를 사로잡은 1990년과 두 번째 실황 전집이 나온 1993년 사이였으니 그 기량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음반에 대해 검색하다 내한 연주회에 참석한 분이 연주회의 분위기와 당시 느낀 감정을 잘 전달한 후기를 보기도 하였다.

당시의 실황 녹음이 남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관객들에 대한 부러움이 교차했다.


"음반사에서도 사활을 건 사업이니 스타 지휘자를 내세워 새로운 녹음이라느니 전통의 어쩌구니하는 식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한다.


그러면 우리의 크립스는 어떨까. 아아! 하늘이 우리를 저버린 것인가. 어째서 에베레스트 같은 염가의 레이블에서 녹음을 했을까? 그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 음반이 재발매될 때마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소리로 리마스터링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신불에 의지해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희미한 희망과 큰 불안을 안고 아X존을 뒤적거린다."


요제프 크립스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아마존 후기


한 해 동안 즐겨 듣던 음반이 T 모 레코드 샵에서 새롭게 리마스터링을 해, SACD 하이브리드 음반으로 한정 판매를 한다는 뉴스를 보지 말아야 했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리마스터링을 한 음반이라니. 거기다 SACD로 들으면 얼마나 더 좋겠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결제를 해버리고 말았다.


과연 새로운 음반은 좋았을까. 리마스터링의 효과는 미미했고 SACD 플레이어도 없다. 욕심은 현실의 간극을 채우지 못했다. 크립스의 베토벤 전집은 염가의 레이블이지만 스베틀라노프의 차이코프스키 도쿄 실황 전집은 뛰어난 녹음으로 유명한 레이블이다. 귀가 좋은 것도 아니니 미세한 차이의 리마스터링은 구별을 못 할 수 밖에.

리마스터링 음반의 교훈은 강렬했다. 음반사에서 무덤 속에 묻혀있는 음반을 부활시켜 그럴듯한 문구로 꽃단장하고 내보일 때마다 차이코프스키 전집 음반의 교훈을 떠올린다. 아사히나 다카시는 분기마다 부활했고 심지어 푸르트벵글러는 글로벌 시대에 발맞추어 made in china 강령술로 돌아왔다. 클래식의 세계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세상이다. 내 제사상과 취향은 좁기 그지없어 그 많은 시체를 품기엔 부족했다.


신불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이 애플뮤직으로 그들의 냄새를 먼저 맡는다.

이제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거의 모든 음반이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복숭아 나뭇가지와 팥이 되어 구매를 막아주었다.

옴 마니 반메 훔.


그들은 그리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한정판이란 명패를 달고 있는 시체 하나가 문 틈 사이로 먹이를 찾아 노려본다.

온라인 서점에서 날아온 메일에 담긴 문장 하나. 문장에 담긴 그 악취는 코를 막아도 흘러 들어왔다.

※이 앨범은 물리적 제품(실물 CD)으로만 발매되며, 현재 스트리밍 등 기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배포 계획은 없습니다.


"찾았다."


시체와 내 눈은 마주치고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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