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망작을 만나다

〈원더풀 데이즈〉

by 백수광부

2002년은 열정이 가득한 해였다. 프로야구에서는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실사 영화⟨ 스파이더맨⟩과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이 극장에 걸리고,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4강 진출이란 쾌거를 거두었으며, 내 손으로 뽑은 후보가 당선되는 결과를 보았다.


내년에는 더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다.


2003년 여름이었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한 이후, NBA를 자주 볼 수도 없고 관심도 시들해졌지만, 그래도 NBA에 대한 흥미를 아주 잃지는 않았다. 가끔은 새로운 정보가 없는지 〈스포츠 2.0〉이나 〈루키〉 잡지를 뒤져보았다.


NBA에 드래프트 된, 드래프트 전부터 주목을 받은 한 고등학생이 이목을 끌었다.

이 학생은 기량도 기량이지만 낭만적인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학생은 잦은 이사로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고 학업에 전념하기도 어려웠다. 농구를 시작하며 이 아이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농구 클럽에서 평생을 함께 할 친구들을 만난다. 학생은 자신과 친구들을 Fab4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Fab4는 중학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그 중심에 있었던 학생은 농구 명문고 진학이 유력했다.


Fab4 중 한 친구가 농구 명문고 진학에 실패하자 학생 역시 농구 명문고 진학을 포기한다. 돈독했던 우정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라는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농구로는 별볼일 없는 무명의 학교였다.

Fab4는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에서도 파란을 일으킨다. 신입생 때부터 주전을 꿰차고 주 챔피언에 오른다. 의리를 택한 학생의 기량은 날로 성장해 2학년에 전국 MVP가 되고 연이어 여러 상이 주어졌다.


고등학교를 3 연속 주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학생에게 매스컴의 관심도 높아졌다. 고교 농구 시합이 미국 전역에 방송되기도 하고 개인 스폰서가 붙고, 고가의 유니폼을 선물로 받아 제명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NBA에 지금 뛰어도 분명 뛰어난 활약을 하리라. 농구 관계자들은 그리 생각했다.

학생 또한 홀로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NBA에 가기로 한다.


역대 최고의 신인 선수.

초대형 신인의 등장으로 플레이오프에 가지 못하는 팀들은 탱킹 경쟁을 한다. 탱킹이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이 적은 팀이, 다가올 드래프트에서 좋은 선수를 얻으려 일부러 패배해 낮은 순위를 노리는 전략이다. 드래프트는 픽 순위가 높을수록 좋은 신인을 얻을 확률도 높다.


뛰어난 신인 선수를 영입하고 싶은 팀은 낮은 순위를 차지해야 신인 선발에서 우선권을 가질 확률도 높다. 시즌이 끝난 후 팀의 순위가 낮을수록 드래프트에 유리하다. 농구는 코트에 다섯명이 서는 경기이기에 한 선수가 가지는 영향력도 그만큼 크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대형 신인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꼴등이라는 쾌거를 달성, 추첨을 통해 1순위로 의리 있는 학생을 뽑았다. 학생의 이름은 르브론 제임스다.



그해 드래프트의 르브론 제임스만큼 큰 기대를 갖게 한 국내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제작비를 100억이나 들인 SF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였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르브론 제임스가 될 것인가.

거액을 들인 애니메이션이 제작된다는 소식에 장르 팬들과 애니메이션 팬들의 가슴이 설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개봉에 앞서 공개된 예고편을 보고 그 뛰어난 그래픽에 더욱 기대가 높아졌다.

개봉일 새벽이었다. 개봉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그전날 낮잠을 잔 탓인지 잠이 오지 않기에 생애 처음으로 조조영화를 보러 구로역으로 향했다.


상영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스포츠 잡지 〈스포츠 2.0〉 의 03년도 NBA 드래프트 기사를 읽었다. 드래프트가 된 르브론 제임스, 다르코 밀리시치, 카멜로 앤서니,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 등 새로운 신인들의 기사였다. 이들이 NBA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리고 이 선수들처럼 〈원더풀 데이즈〉도 전무후무한 작품이 될것이라 기대했다.


기사를 읽으니 배가 고팠다. 달리 문을 연 식당은 없고 역사 내에 위치한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우동을 주문했다. 우동. 밀가루로 만든 굵은 면을 삶아 가쓰오부시나 멸치, 다시마 등으로 낸 국물에 담가 먹는 음식.

그러나 그 분식집이 정의한 우동은 달랐다. 육수에서 아무 맛이 나지 않아 면을 물에 담 먹는 듯한 맛이었다. 배가 고픈 것이 다행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잠이 덜 깬 머리가, 우동면을 물에 담거 먹는 낯선 감각으로 완전히 깨어났다.

끔찍하게 맛이 없는 우동 덕에 영화를 볼 준비는 된 셈이다.


상영 시간이 되자 극장에 들어갔다.

첫 상영 시간의 애니메이션 작품이라 그런지 〈원더풀 데이즈〉를 보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콜라로 입을 씻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고대하던 그것을 보았다.


그날 나는 보았다.

제작비 100억이 허공에 흩날리는 광경을.

국내 애니메이션과 SF 영화의 기대주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OST는 훌륭했지만, 그것마저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이었다.

미래를 바꿀 운명의 판타지는 다른 의미로 미래를 바꾸었다.

〈원더풀 데이즈〉의 실패로 한국 애니메이션은 이후 기나긴 침체기를 겪는다.


2003년, 드래프트 된 선수들은 NBA의 새로운 물결이 되었다. 그해 신인이었던 카멜로 앤서니,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는 은퇴 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는 이제 마이클 조던과 우열을 가리는 선수가 되어 아직도 현역으로 코트를 누비고 있다.

〈원더풀 데이즈〉 역시 새로운 물결이 되기는 했다. 망작이라는 물결 말이다.

조조할인 덕에 물우동과 망작을 체험하는 경험을 했으니 어찌보면 행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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