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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합진으로 나아가라

애니메이션 〈퇴마록〉

by 백수광부


〈퇴마록〉이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PC통신에서 연재한 〈퇴마록〉은 박 신부, 장준후, 이현암, 현승희 등 퇴마사들이 세기말을 배경으로 초자연적 존재들과 싸우는 어반 판타지다.


세기말은 무서운 시대였다.

호환, 마마, 전쟁보다 두렵다는 무분별한 불법 비디오가 판을 치고, 불법 비디오는 소년·소녀들에게 저렴하고 빠르게 바다 건너 문화를 선보였다.

199X 년은 2000년이 되면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와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이 돌던 시대였지만 소년·소녀들은 바다 건너 만화로 예언 따위는 잊을 수 있었다. 참으로 무서운 불법 비디오다.

그중 괴력난신을 다루는 〈공작왕〉과 〈3x3 EYES〉 는 요마를 퇴치하거나 미소녀 요괴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오컬트 물이다.

그리고 소설 〈퇴마록〉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푸른색 화면에 올라오던〈퇴마록〉은 우리말로 쓰인 퇴마물이다.

군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지만 소인들은 새로운 소설에 열광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했지만 《일본은 없다》, 《J·J가 온다》 등 90년대 일본을 다루던 서적에서 보이던 편견이 드러나는 묘사나 환단고기와 관련한 주장을 다루는 문제 등이 있었다. 퇴마록으로 수밀이 국이나 가림토 문자 같은 괴이한 주장을 처음 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문장 역시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누적 판매량 1,000만부를 달성한 이야기와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주연들뿐 아니라 '칙쇼'와 '바가야로'가 말버릇인 홍녀나 주기 선생 같은 조연들도 인상적이었다.

와불이 일어서면 정말 열도가 가라앉을지도 궁금했다.

시간의 모래에 파묻히지 않은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피아니스트 조성진마저 팬으로 만들었다.


작가와 팬들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퇴마록〉의 영화화다.


감독은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배우들도 원작을 읽지 않았다.

결과물이 좋았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원작을 무시하고 IP만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원작을 무시해 멋대로 변형한 설정들, 어설픈 CG, 신현준의 부족한 연기력 등 영화가 굳이 퇴마록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작가와 팬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영화다.

피우던 담배꽁초를 건물 안으로 던지자 불이 번져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은 금연 캠페인을 위해 제작된 영화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원작자 이우혁 역시 두 번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미디어 믹스에 있어 태도가 바뀌게 된다.


애니메이션 〈퇴마록〉 은 현암, 준후, 퇴마진이다! 퇴마아아아! 합진! 이 나오는 〈측백산장〉 이전의 이야기인 〈하늘이 불타던 날〉을 다룬다.


2025년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이니 시대에 맞는 변형이 적절하다.


퇴마록 등장인물들의 나이를 대충 계산해 보자.

소설 설정 그대로 등장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났다.

하루키보다 연상이었던 중년 박 신부는 이제 연하가 되어야 한다.

승희와 준후 역시 21세기에 태어나야 맞다.

〈퇴마록〉을 처음 봤을 때 아저씨였던 현암은 당시 독자들을 형이나 누나라 부르는 나이가 된다.

시간은 잔인하다.


그리하여 박 신부, 승희, 준후, 현암은 원작보다 대략 30년 정도 젊어졌다.


21세기에 맞게 변형된 배경들은 사실적이며 CG 역시 한국적 미를 적절히 표현한다.

〈원더풀 데이즈〉에서 22년이 흐른 국내 애니메이션의 발전은 감동적이었다.


상처를 주었던 영화와 달리 인물들 역시 살아 움직인다.

아저씨는 믿음직한 체격의 협을 아는 입이 거친 동생이 되고, 박 신부는 덩치도 어깨도 큰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잠시나마 모습을 비치는 승희 역시 반갑기 그지없어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준후 형, 아니 준후는 애어른이 되기 전 천진한 모습으로 팬들을 맞이한다.

팬들이 알고 있던 그 퇴마록의 인물들이다.


원작을 충실히 재현한 이 작품을 작가도 팬들도 오래 기다렸다.

작품 외적인 이유로 손익분기점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후속작을 제작한다는 희소식까지 있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 〈파묘〉,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같은 퇴마물이 흥행한 덕일지도 모른다.

시대는 바야흐로 괴력난신의 시대니, 국산 퇴마물의 원조 퇴마록 후속편의 흥행을 위해 외쳐본다.


"현암, 준후, 퇴마진이다! 퇴마아아아! 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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