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물을 좋아하는 취향은 부모님 고향 태안으로부터 시작된다.
시골에 내려가 할아버지를 만나노라면 항상 꺼내시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지금 조카 나이 정도 되었던 나는 지금도 그랬지만 먹는 것에 대한 겁이 없었나 보다. 가족들이 다 같이 만리포에 나가 조개를 캤던 날이었더랬다. 각자 한 바가지씩 캐고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위한 조개를 손질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놀려주려는 마음에 껍질 깐 바지락 생조개를 내밀었다. 질겁하는 모습을 상상했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덥석 받아먹는 손녀의 모습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아직까지도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말한다.
태안은 해안선이 많이 복잡해 만과 반도가 많다. 해안가에 넓게 갯벌이 분포해 있어 각종 다양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종종 갯벌에 나가 맛조개와 바지락을 캐왔고 누구는 낚시로 망둥어를 낚아왔다. 또한 할아버지 집은 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농사도 함께 지으셨다. 부지런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밭을 놀리지 않으셨고 그 결과 제철 채소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시골의 밥상은 육고기가 많진 않았지만 해산물과 김치로 채워져 부족하지 않은 식사였다. 시골이 있는 집이 으레 그랬듯이, 더운 여름엔 수박과 참외를 까먹고 겨울엔 아궁이에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었다. 땀 뻘뻘 흘리며 손에 끈적하게 묻은 수박 물을 핥고 새까맣게 그을린 고구마 껍질을 벗기다 옷도 버리기 일쑤였다.
또 무얼 먹었나 떠올려 보면 게장이나 각종 젓갈들을 먹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난 알이 꽉 차게 들은 설게(쏙) 젓갈을 좋아했다. 설게 껍질을 발라 투명한 살과 반짝이는 알을 밥에 올려 먹으면 그만큼 풍성한 맛이 없었다. 사각사각 씹히는 알이 참 매력적이었다. 동생이랑 알만 발라 먹으려다가 혼나곤 했었다. 알맞게 삭혀진 조개젓에 고춧가루를 넣어 매콤하게 먹는 조개젓 무침도 밥도둑으로 그만이었다. 쪽파나 양파같은 야채를 잘게 다져 넣으면 아빠도 좋아해 자주 먹던 음식이었다. 그리고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에는 게국지를 먹었다.
쓰기야 게국지라고 쓰지만 사실 말할 때에는 '께꾹찌'라고 발음한다. 세상에, 된 발음으로 만 세 글자가 이어진 음식이 있다니. 난 이것이 당연히 표준어가 아닌 줄 알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음식인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지인들하고는 이 얘기를 꺼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강화도를 가는 길에 음식점 간판에 게국지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된 발음의 께꾹찌가 아닌 게국지가 표준어라는 것도, 게국지가 우리 집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안 것이다. 이때 들었던 생각은 '이걸 팔기도 한단 말이야..?'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전년도에 담갔던 간장 게장은 거의 다 먹은 상태다. 간장 꽃게장은 몸통에 살이 많기 때문에 귀찮은 다리 부분은 거의 남기게 되었다. 할머니는 먹고 남은 게장 왕발과 배추김치를 넣어 게국지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특별한 맛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장 국물에 베인 바다향과 팍 익은 김치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해주던 게국지는 엄마가 종종 해주는 음식이 되었다. 찌개를 거하게 차리기 귀찮을 때, 게장 반 마리 그리고 조개나 새우 등 냉동실에 있는 재료와 김치를 넣고 끓여냈다. 구수하고 짭조름한 게국지는 그거 하나로도 한 끼 해결하기 괜찮았던 것이다. 긴 배추 하나를 쭉 찢어 쌀밥에 싸먹었다. 게장 왕발만 들어갔던 할머니의 게국지보다는 개선된 모습이었다. 엄마가 평일에 애용하는 찌개이기도 했다. 이렇게 집에서 남는 재료들로 만들어낸 게국지를 음식점에서 판매한다니, 나는 그래서 자세히 살펴볼 생각도, 사 먹어볼 생각도 안 했다.
퇴근길에 방영하는 맛집 소개 프로그램을 보다가 또 게국지를 보게 된 것은 며칠 전이었다. 파는 게국지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나니 그제야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크기가 큰 꽃게가 몇 마리 들어가고 야채도 푸짐하게 들어가 마치 꽃게탕과 흡사했다. 푹 익은 묵은지가 들어가 국물 맛이 일품이라며 음식점에 방문한 손님의 인터뷰를 보면서 '아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구나'하고 피식 웃었다. 보기만 해도 풍성하고 진한 맛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자주 먹지 않았던 우리집 게국지가 생각났다. 다음번에 엄마가 요리할 때 옆에서 잘 봐 두어야겠다. 쏜살같은 시간이 야속한 요즘, 내가 알고 있는 게국지는 화려하지 않은 맛이고 평범한 어느 날에 또 생각나 아쉬워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