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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장 Apr 02. 2020

구내염이 심해졌다.

괜한 욕심을 부렸나보다.


  요 며칠 무리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구내염이 심해졌다. 내 몸은 정직하다. 조금 무리하는가 싶으면 곧바로 몸이 힘들다고 얘기한다. 입술이 부르트거나, 종아리가 무겁거나, 이번처럼 구내염이 생긴다. 몸이 아닌 정신이 지쳐도 마찬가지다. 겉으론 안 그런 척 해봐도 소용없다. 몸은 알고 있다.


  최근 나는 새롭게 직장을 옮겼다. 그것도 말단 신입으로 들어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말단으로 이직을 하다니. 주변의 만류도 있었지만, 내 선택에 만족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이가 많기 때문인지, 경력이 있기 때문인지 새로 옮긴 직장에 적응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도 나름 짧지 않는 사회생활 경험이 나를 쉽게 적응시켜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그 동안의 직장 경력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러한 경력이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몸에 밴 직장 생활 방식 때문이다. 때로는 지금과 이전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지금의 직장에 불만을 표현하며 깎아 내리기까지 한다. 이전 직장이 그리운 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최근에 옮긴 현재의 직장에 만족한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익혀 지금의 조직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욕심이 났다. 일을 더 잘하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남들처럼 ‘완전 초보’는 아니니, 다른 신입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얘기하면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초반에 빨리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노력하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로 일했다. 일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모임과 회식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일단 참석하면 술도 열심히 먹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인정받고 싶었다. 늦은 나이에 말단으로 들어갔기에 조급증이 났다. 근무시간에는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가며 일을 했다. 저녁도 간단히 때우며, 야근도 불사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나는 ‘신입’으로 들어왔지 않은가. 내가 내보일 수 있는 성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성과는 커녕 솔직히 아직 그룹웨어 사용도 서툴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가며 야근을 한다 한들 옆자리 과장님에 비해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조직은 ‘열심히’ 보다 ‘잘’하는 직원을 좋아한다. 물론 열심히 하다보면 잘 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지만, 초반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태어났을 땐 걷지도 못하는 걸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그래도 나는 뚜벅뚜벅 홀로 걷고 싶었고, 심지어 처음부터 내달리고 싶었다. 그러자니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깨지고 부딪히는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 상처를 그냥 참고 또 일어나고, 다시 걷고 달렸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힘들었나보다.




  신입사원은 좀 실수해도 된다. 나는 그걸 신입사원만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신입사원이라면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다. 좀 서툴러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설령 뭐라 하더라도 뭐 어떤가. 앞으로 내가 보여줄 성과는 무궁무진할 텐데! 조급해 하기 보다는 차라리 회사의 분위기를 익히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업무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배우 성실함이 더 낫다. 하루 종일 복사만하고, 전화만 받는다 한들 좀 어떤가? 당장 근사한 기획안을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시작해보면 그것 역시 쉽지 않다. 신입사원이라서 그렇다. 아직 낯설어서 그렇다.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이전 직장에서는 ‘실력 있는 과장’이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아니다. 좋게 봐준다고 해도 그저 ‘능력이 있는(있을 것 같은) 신입사원’에 불과하다. 여긴 새로운 곳이다.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걸 받아들이자.


전화만 잘 받아도 신입 딱지는 뗀 셈이다. 전화업무가 결코 쉽지 않기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직장의 진리, 신입사원이 회사를 구하기 어렵다는 걸 구내염이 심해지고 나서야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다고해서 결코 대충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대신 앞으로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이렇게 몸이 신호를 보내는걸 보니, 비록 몇 달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지친 모양이다. 내가 나를 너무 괴롭혔나보다. 이제부터라도 기꺼이 ‘신입사원의 특권’을 누려보려야겠다. 비록 내가 지금 당장 세상을 바꿀 놀라운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잠시 동안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이 내 의견에 귀 기울일 때까지 적어도 “내가 살아남아야 하니까말이다.


  내일 아침에는 구내염이 나았으면 좋겠다. 양치질 할 때마다 자꾸만 칫솔이 상처를 건드려서 더욱 상처가 심해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닦지 않으면 입 속 세균 때문에 염증이 더 심해질 것 같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고통을 참고 꾸역꾸역 칫솔질을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상처만 키웠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칫솔질 하는 방법을 바꿔봤다. 손가락으로 상처를 가린 채 칫솔질을 했다.(보기에는 흉하지만, 뭐 어떤가. 화장실에 나 혼자 뿐 인데.) 칫솔모가 상처에 직접 닿는 것을 손가락이 막아줬다. 입속 세균도 제거하고, 상처도 자극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통을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니, 치아와 상처에 모두 도움이 될 방법이 있었다.


  그렇다. 아무리 어렵고 막막해도 분명 방법은 있다. 신입사원인 내가 그럴싸한 기획안을 써야만 회사에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윗분들이 하시면 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들이 고귀한(?)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면 된다. 괜히 남에 일에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에 전념하는 게 낫다. 신입사원은 머리가 아닌 몸이 바빠야 한다. 복사하고, 전화를 받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꼭 하찮은 일은 아니다. 나는 그들과 한 팀을 이뤘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는 공격수로 날카로운 슛을 날려야 하고, 누군가는 골문 앞에서 상대를 온 몸을 다해 막아내기도 해야 한다. 그게 팀이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구내염이 야속했다. 한없이 저렴한 체력이 안타까웠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해서 빨리 인정받고 싶었기에 이런 상황이 속상했다. 아니다. 이제 보니 구내염이 고맙다. 피곤할 때면 부르트는 입술에 고마워해야겠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생겨난 심각한 암 덩어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자잘한 염증이라서 고맙다. 그리고 자잘한 염증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나라서 다행이다. 덕분에 잠시 쉬어갈 수 있고, 뒤를 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당신과 글로써 소통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구내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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