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냉장고는 지가 할래유~!
뜻밖이었다. 평소 조용하기만 했던 넷째 숙부도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질세라 다른 형제들도 자신이 맡고 싶은 살림을 하나씩 정해나갔다. 추운 겨울, 무언가를 결심하기 좋은 새해 첫 달, 그들은 부모님께 효도 한번 해보자며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천안시 목천읍의 한 시골동네. 그곳으로 시집온 할머니는 평생을 부족함 속에서 살았다. 아니, 그 보다는 ‘부족함을 견뎌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여섯 아들을 키우고, 손주인 나까지 키워내며 부족하고 고된 삶을 견디고 또 견뎌냈다. 그러는 동안 열여덟의 아담했던 아가씨는 주름만 자글자글한 할머니로 쪼그라들었다. 할머니는 너무 활동적이었던 아들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남들과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덕분에 할머니는 평생을 두통에 시달리셨다. 주머니에는 늘 진통제를 넣고 다니시며 하루에도 몇 번씩 드시고는 하셨다.
그랬던 형제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대견스럽게도 그 동안 고생한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연초부터 이렇게 모인 것이다.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전축, 장롱을 책임질 사람이 순식간에 정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순식간에 물건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허풍 섞인 말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대화가 좋았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집안 가득 채워질 새로운 살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할머니는 냉장고를, 나는 텔레비전을 기대했다.
그렇게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번에도 말 뿐이었다며 포기한 채로 여름을 맞이했다. 시골의 여름은 가혹하다. 내리쬐는 뙤약볕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밭일을 하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그 더위를 견뎌내야만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여섯 아들들이 모두 출가를 하고, 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할머니와 나는 제법 긴 시간을 단둘이 함께 살았다. 여름 방학 중이던 어느 날. 할머니는 새벽 일찍 밭에 나가셨다. 그럴 때면 나는 홀로 아침을 맞이한다. 할머니는 나에게 가급적 농사일이 아닌 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셨다.
여느 날처럼 홀로 아침을 차려먹고 밥상에 앉아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방에만 있어도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할머니는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뽀얗게 뒤집어 쓴 흙먼지를 툴툴 대강 털어내고 그대로 ‘털썩’ 마루에 주저앉으셨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그날의 고된 한숨이 묻어났다. 할머니는 시원한 물을 한 잔 달라하셨다. 오래된 냉장고, 그 속에 넣어둔 물은 언제나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나마도 시원해지려면 한참이 걸렸다. 나는 차라리 지하수를 떠다드렸다. 수도꼭지를 한참동안 틀어두고 할머니를 바라봤다. 신발 벗을 힘도 다 써버리셨는지 벽에 기대앉은 모습이 쓸쓸하기까지 했다. 지친 모습이 안쓰러웠다. 할머니는 단숨에 벌컥 물을 마시고서야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며 내 안부를 묻으셨다. 내가 잠은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국은 데워 먹었는지. 나는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한데 말이다.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신지, 많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오후에는 푹 쉬실 수 있으신지.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런 날 할머니한테 시원한 물 한 사발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바람이 통했을까. 여섯 살림 중 냉장고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비록 얼음까지 나오는 최신식은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반짝이게 닦으셨다. 할머니가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둘 뿐인 집, 조용한 밤이면 유난히 크게 들리던 ‘쪼르륵’ 냉매 흐르는 소리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냉동실을 얼음으로 가득 채워 두셨다. 덕분에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도, 시금털털한 오이냉국도 참 많이 먹었다.
지금은 냉장고가 아니라 정수기만으로도, 따뜻하고 시원한 물을 언제든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세상이다. 나는 취직하면서 할머니께 그런 정수기를 선물로 설치해 드렸다. 비록 몇 년 쓰시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안부전화를 드릴 때면 늘 고맙다고, 그런 내가 늘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할머니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벌써 돌아가신지 몇 해가 지났지만,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다.
유난히 뜨거웠던 그 날, 시원하지도 않았던 물 한 잔에 고맙다며 환하게 웃으셨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벌겋게 달아오른 내 눈가에 서늘하게 사무친 그리움이 방울방울 맺히는 것만 같다.
※ 본 글은 "천안문화독립도시 아카이빙 2020" 수록작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