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얼마 전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업무는 한국어로도 충분하고, 이민을 갈 생각도 없지만, 영어를 공부해 보기로 했다. 학창 시절부터 토익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했지만, 나는 여전히 영어에 서툴기만 하다. 영어로 말하는 것은 물론, 읽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행여나 구글 검색에서 영어 사이트가 열리기라도 하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닫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영어 이 녀석"을 공부로 한번 혼내주고 싶었다.
먼저 목표를 정해보자. 내 영어 공부의 목표는 유창한 대화도, 화려한 글쓰기도 아니다. 그저 영어로 된 문서라도 그럭저럭 읽어내기만 해도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다. 나는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싶었다. 원서 그 자체의 날것의 느낌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번역서의 덜걱거리는 문장이 아니라, 영어 원문 그 자체로 작가의 의도를 느껴보고 싶었다. 구글 검색에서 영어 페이지가 열려도 당황하지 않고, 슥슥 읽어 내려가며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전략을 세워보자. 나는 단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어 읽기는 단어 싸움이라 생각했다. 사용빈도가 높은 어휘 1만 개를 목표로 삼았다. 하루에 100개씩 외우면 100일, 50개씩 외우면 200일, 30개씩 외우면 1년이 걸린다. 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돌봐야 하니, 가용할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루 30개 정도를 목표로 삼고, 1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호기롭게 단어장으로 쓸 노트를 구입하고, 첫 장을 열어 반으로 딱 접었다. 왼쪽에는 영단어, 오른쪽에는 한글 뜻을 적었다. 영단어 30개를 죽 밑으로 적어두고는 잘 안 외워지는 단어에 형광펜으로 색칠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다음날도 외우고, 잊을만하면 또 들춰보며 외웠다. 그런데... 생각처럼 안 외워진다. 심지어 해당 단어의 주변에 있는 다른 단어는 그 뜻까지 떠오르는데 정작 해당 단어는 도저히 모르겠는 경우도 많았다. 에빙하우스의 기억 곡선은 거짓말인 것 같다. 만약 사실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예외의 경우인가 보다. 외워지지 않았다. 일대일 매칭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핑계가 늘었고, 공부를 미뤘다. 나쁜 습관은 왜 그리도 쉽게 만들어지는지. 자꾸만 미루다 보니 어느새 '포기'라는 녀석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내 주제에 무슨 원서 읽기람. 그냥 번역서라도 열심히 읽자.' 이번에도 영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같다. 언제나 갖고 싶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너란 녀석을 또 한 번 놓아주어야겠다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영어와의 애틋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즈음 이 책을 만났다. 운명이었다.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책에서는 배움의 4가지 기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주의, 적극적 참여, 에러 피드백, 반복과 통합" 내가 하던 공부 방법은 위 4요소에 전혀 맞지 않았다. 일대일 매칭은 지루했고, 그래서 자꾸만 공부를 미뤘다. 내 방법이 잘하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반복하기는커녕 억지로 자리에 앉아 형광펜만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배움이란 외부 세계의 내부 모델을 만드는 것이라던데, 이 방법으로 만들어낸 배움의 모델은 사상누각이 아니라, 그저 한낱 모래알처럼 연약하게 부서지기만 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우선 욕심을 내려놓았다. "하루 30개"라는 강박에서 벗어났다. 대신 하루 30분을 투자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매일 30분이 힘들다면, 일주일에 210분은 지키자는 게 수정된 목표였다. 타깃도 수정했다. 모든 단어가 아닌, 잘 안 외워지는 단어를 중점적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우선 모르는 단어, 어려운 단어를 따로 체크했다. '북마크'된 단어가 바로 주요 공부 대상이다. 공부 방법은 예문이었다. 노트를 치우고 PC를 켰다. 나는 볼펜으로 쓰는 것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편했다. 단어별로 예문을 옮겨 적고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또 다른 예문을 살펴봤다. 영영 사전의 뜻풀이도 추가했다. 기존의 방식이 '영어 - 한글 뜻'이었다면, 바꾼 방식은 '영어 - 영어 예문(영어 뜻)'였다. 기존 단어장과 달리 영어로만 공부하는 이 방식은 일종의 '퀴즈 형식'을 가미한 셈이다.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예문을 통해 앞뒤 문맥을 보며 뜻을 유추하며 단어를 공부했다.
기존 방식은 지루했다. 단어의 한글 뜻을 손으로 가린 채 영어 단어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뜻을 짜내야 하는 공부 방법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그 뜻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자괴감으로 무력해지기도 했다. 바뀐 방법은 그렇지 않다. 영영 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대부분 그 뜻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도 어려운 단어는 또 다른 예문을 찾아가며 더욱 적극적으로 공부했다. 해당 단어의 새로운 뜻을 스스로 피드백하며 내 안에 '영어라는 세계'를 조금씩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어쩌면 기억은 일대일 매칭이 아니라 다대다 매칭인 것 같다. 누구나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 노래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연상되는 시기나 장소, 심지어 냄새와 촉감이 있지 않은가? 예문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효과를 낸다고 생각한다. 앞뒤 단어를 보며 유추해 내고, 영영 사전의 풀이를 살펴보는 것은 해당 단어의 연결 고리를 늘려준다고 말이다.
그리고 최근, 나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예문을 직접 만들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훌륭한 커뮤니티에서 제대로 된 사람들과 함께 영어 공부를 한다. 서로의 발전을 응원하고, 피드백해 주며 함께 공부하는 이 모임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실력에 근성, 인성까지 겸비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굉장한 실력자도 여럿 있어서 상당한 동기부여가 된다. 무엇보다 함께 공부한다는 생각에 외롭지 않다. 그중 유독 밝은 에너지를 뿜는 한 분이 영작을 제안했다. '아직 예문 해석도 버벅거리는데, 내 주제에 영작이라니.'라는 생각이 번지기 전에 서둘러 "참여"를 선언해 버렸다. 얼떨결에 '하루 한 줄 영작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작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매일, 그리고 창작(응용) 해서 영어 문장을 인증하면 된다. 나는 잘 안 외워지는 단어를 골랐고, 예문부터 공부했다. 딱히 응용할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많은 예문을 찾아봤다. 이 과정에서 나 스스로 놀란 건 내가 '영어의 뉘앙스를 고민하고 있었다'라는 점이다.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외울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문맥상 올바른 표현인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첫 문장이 만들어졌다.
I can't conceive of what we're going to do.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해낼지 알 수 없다.)
첫 단어인 conceive는 (생각을) 품다, (아이를) 가지다.라는 뜻의 단어다. 하지만, 이게 imagine, think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줄 영작을 위해 수십 줄의 예문을 찾아본 것 같다. 그러다, 한 줄을 작성했다. conceive를 그저 영어-한글로 외웠다면, 아마도 내가 만든 문장조차 해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장을 심지어 만들어 낸 것이다!! 영작을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영작을 하는 동안 나는 굉장히 '집중'해서 해당 단어를 공부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어떤 문장을 써야 할지, 어떤 예문을 응용할지 고르는 과정에서 conceive는 머릿속에 이미 새겨졌으리라.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라면,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피드백'이다. 나는 나 스스로 조금 더 완벽한 문장을 쓰고자 노력했다. 단톡방에 올리기 전에 오탈자가 있는지 여러 번 반복해서 검토했다. 하지만, 실력자의 눈은 이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나름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실력자는 단번에 내 문장을 교정해 주었다.
I can't conceive of what we're going to do.
I can't conceive of what we're going to achieve.
성과에 중점을 둔다면 do보다는 achieve가 어떻겠냐는 조언이었다. 물론이다. 당연히, 고친 문장이 훨씬 좋았다. 내가 원하는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achieve가 더 적당했다. 번역기 쉽게 얻어낼 수 없는 귀한 피드백이었다. 인출을 통한 에러 피드백은 배움을 강화시킨다. 스스로 테스트해 보고, 거기에 실력자의 조언까지 더해진다면, 한 층 더 깊은 배움이 가능하다. 하지만, 주변에 실력자가 없다면? 그래도 괜찮다. 기록하면 된다. 우선 기록해 두고 나중에 다시 살펴보면 된다. 스스로 피드백하는 것이다. 올바른 배움의 단계를 거친다면, 분명 과거의 자신보다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공부하면서 불안하더라도 괜찮다. 미래의 실력자인 자신이 곧 그럴싸한 피드백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배움은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인출하고 시험해 보는 것이다. 중년의 나이, 그다지 필요도 없는 영어 단어 공부를 통해 나는 더없이 귀한 삶의 지혜를 얻게 되었다.
굳이 영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평생을 무엇이든 배우고 익히며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익히며, 기능을 숙달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그리고 더 즐겁게 배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멋진 조언이 바로 이 책에 담겨있다.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뇌는 다층적 구조를 가졌다. 우리의 뇌는 오늘 외운 단어를 '으쌰'하고 짐을 옮기듯 장기기억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다. 오늘 외운 단어는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은 다양한 기존 기억들과 '연결'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기억은 사라진다(연결되지 않은 기억이 사라지는 건 마치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도 하다). 그리고 살아남은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보내는 것 역시 '으쌰'하고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기존 기억 간의 연결통로를 확장함으로써, 그리고 더 많은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해진다. 우리 뇌는 다층적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다양한 층위의 기억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결이 넓어지거나, 많아지면 자연히 기억하는 게 많아지고, 새로운 통찰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번 책의 표지는 아주 훌륭하다. 다층적 뇌 구조를 잘 보여주는 탁월한 디자인이라 생각한다.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08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