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_ 톰 올리버 지음 (권은현 옮김)
외롭다. 마치 음소거가 된 듯, 보이지 않는 막에 갇히기라도 한 듯, 외로운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만 같다.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고, 언제라도 연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건만, 외로움은 오히려 나를 더 자주 찾아오는 것만 같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친구는 적어지고, 외로움은 늘어가는 기분이다. 어릴 적 친구들은 이제 그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서로 한 몸처럼 지냈던 그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친구'라고 부를만한 이들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그렇다. 그토록 많은 이들을 만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친구를 만나기가 더 어려워졌다. 나이가 같아도 그저 ‘동갑’인 직장 동료일 뿐이었다. 끈끈한 친구로 발전했던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마저도 부서를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 지역을 옮기면 더 멀어져만 갔다. 친구가 사라질수록 외로움은 더해졌다.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살 대신 막막한 안개가 나를 뒤덮는 기분이다. 누구도 나를 가두지 않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 외로움은 내게 짙은 안개 같은 느낌이다. 축축하고 서늘한 기분. 그런 날이면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오래된 친구가 비추는 따스한 햇살이 간절하기만 하다.
물론,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긴 하다. 몇 안 되긴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소중하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났던 때가 기억난다.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던 그날, 서로가 접점을 찾으려 분주했던 그날을 말이다. 그날의 우리는 우리가 이토록 친하게 지내게 될 줄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만남이 서로의 끈을 나누어주는 것이라면, 친해짐은 그 끈을 서로 당겨 팽팽하게 유지하는 것 같다. 자꾸만 서로 끌어당겨 가까워지는 일. 어쩌면 친해짐이란 연결을 끌어당겨 접촉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연결은 접촉이 될 테니까.
살다 보면, 사느라 바빠서 연락이 뜸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끈은 쉽게 사그라들기도 하고, 또 어떤 끈은 오히려 그 끈이 굵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믿음의 끈'은 '의심의 끈'과 달리 지금 연락하지 않아도 언젠가 연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먹고 자라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만나지 않고 연락하지 않으면 서로의 끈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로 접촉이 없다고 해서,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상대도 나도 세상 모든 끈을 다 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상황에 따라, 여건에 따라 내가 부여잡은 끈도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나 역시 필요에 의해 수많은 끈을 잡고 풀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친해짐이 연결을 끌어당기는 일이라면, 멀어짐이란 그 연결을 풀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연결이 접촉이라면, 아주 먼 연결은 그리움이리라. 그리고 그마저도 놓아버린다면… 아마도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이 되겠지. 더 이상 아무 연결도 존재하지 않는 적막함, 쓸쓸함,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외로운 단어는 연결이 사라지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연결되고 싶어 하나 보다. 외롭지 않으려고, 체온을 가진 우리가 차갑게 식지 않으려고, 다시 한번 세상의 따스한 온정을 느껴보려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연결은 그 끈의 가짓수가 아닌 그 끈이 가진 팽팽함, 그 끈이 가진 끈적함 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연결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은 그 끈이 너무 끈적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련은 놓지 못하는 연결의 또 다른 말은 아닐는지.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지금의 나는 친구도 아닌, 그렇다고 남남도 아닌 사람들만 많아졌다.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놓아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운 어정쩡한 연결만 늘어나는 기분이다. 미련이 낡아버린 옷처럼 쌓여만 간다. 버리기에는 아쉽고, 그렇다고 입을 일도 없는 작아진 옷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들어 부쩍 친구가 많아졌다. 특이하게도 나는 그 친구들의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심지어 대부분의 친구들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 요즘 내가 자꾸만 끈을 끌어당기는 친구들은 바로 '독서모임'과 '자기 계발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목적이 분명한 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그 목적에 맞는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나는 그들의 본모습을 알 길이 없다. 나는 그들이 다른 모임에서는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속한 모임에서 그들은 언제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나 역시 가능하면, 내가 가진 다양한 모습 중 모임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내 모습은 내가 속한 집단만큼이나 다양하다. 가족과 있을 때는 든든한 남편과 다정한 아빠가 되었다가, 직장에서는 말단 대리의 성실한 모습을 연기한다. 이따금 오랜 친구를 만나면 깔깔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아이가 되었다가, 후배의 고민에는 진지한 조언을 해주는 어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 모임에서는 독서가의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어떤 게 내 진짜 모습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상황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 중 '진정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자아'가 있기는 한 것일까? 책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에서 작가 '톰 올리버'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시간과 우리가 있는 장소와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의식이 걸러내는 데, 의식 자체도 우리 인식의 산물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놓인 환경에서 끊임없이 진화한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다른 인간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중에서
작가는 우리가 가진 정체성이 타인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역설한다. ‘자아’는 상황에 따라, 타인의 평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살다 보면, 조용히 앉아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조언하는 이들이 있다. 아무 연결이 없어진 고독 속에서 과연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설령, 그렇게 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 한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단 하나뿐인 '진정한 자아'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둠 속에 틀어박혀 무엇보다 먼저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한다.’라는 조언은 어쩌면 잔인한 모순이다. 앞서 설명했던 내가 가진 다양한 모습 역시 전부 '진정한 나' 자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역할에 따라 '진정한 나' 역시 언제라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모두들 다양한 세상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홀로 살지 않는다. 이 세상 그 누구라 해도 다양한 끈으로 연결된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가족과 직장, 학교와 모임에서 서로 다른 끈을 내어주기도 한다. 밖에서는 활달하지만, 집에서는 과묵한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너무 다른 끈을 내어주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맞는 자신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반드시 '(상황에 따라 다른 곳의) 자신을 숨기고 (지금 이곳에 맞는) 자신을 거짓으로 꾸며내 연기를 하라'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른 자아, '연결된 자아'라는 것은 내가 가진 수많은 자아 중 상황에 맞는 모습을 꺼내는 일이다.
진정한 맛집은 메뉴가 많지 않다. 메뉴가 다양할수록 상대가 원하는 음식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지만, 지금 자신이 가진 메뉴가 많지 않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육수 하나만 제대로 우려내도 수많은 요리에 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자세, 친절한 태도, 적극적인 사고방식, 포기하지 않는 끈기처럼 다양한 연결에 기본이 되는 재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료는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기본 육수처럼 연결된 자아의 좋은 밑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다른 모습을 연기하다 보면 꼬여버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서로에 내어준 끈이 자칫 엉키는 날에는 그 매듭을 풀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이라는 끈은 엉켜버렸다고 해서 단 칼에 잘라내기도 힘들다. 내 끈을 받은 상대가 이미 다른 이에게 내 끈을 조금 내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다양한' 연결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거짓으로 애쓰지 말아야 한다. 상황에 맞게 내가 가진 메뉴를, 내 능력껏, 정성을 다해 대접하면 그뿐이다.
친구는 서로의 끈을 쉽게 놓지 않는 관계라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의 관계가 잠시 느슨해진다고 하더라도 조급해하는 법이 없다. 언젠가 다시 팽팽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속한 모임이 꼭 이런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함께 연결된 모임에서 몇몇은 적극적으로 서로의 끈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는 호혜와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기꺼이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들과 연결되지 않은 순간에도 그들을 생각하며, 모임에 속한 내 모습을 떠올리며, 몸가짐, 마음가짐을 다시금 다잡아 보기도 한다.
정말이지 연결은 놀라운 힘이 있다. 연결은 시공간의 제약을 무색하게 만든다. 곁에 없어도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적어도 나는 외롭지 않다. 나와 별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 나는 그저 그들의 하루가 빼곡히 정리된 기록들, 작은 화면에서 전해지는 딱딱한 텍스트를 읽을 뿐인데,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들의 글에는 소리가 담겨있다. 진심이 담긴 응원의 박수소리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분명 그들의 위로와 응원, 격려를 느꼈다. 그곳은 그들의 진심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처럼 따뜻하기만 하다. 적어도 그곳에서만큼은 우리는 서로를 친구처럼 여긴다. 적어도 나는 그곳에서만큼은 외롭지 않다. 적어도 그곳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독립된 개인이라는 시각에서 시스템과 깊숙이 연결된 한 부분이라는 시각으로 자아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지속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는 제도적 변경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