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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뱅커 Aug 17. 2024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말이 닿지 않는 순간의 울림

말이 닿지 않는 순간의 울림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글쓴이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종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소통 시 말을 하고 상황에 따라 글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케이코가 수화를 모르는 청인(聽人)과 소통하는 방법은 글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일기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말이 닿지 않는 순간의 빛과 색, 찰나의 시간을 체현해 내는 듯하다. 어찌 보면 영화가 말 못 하는 케이코가 되어 언어로 풀기 어려운 훨씬 감각적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거울에 비치는 케이코>

영화 시작부터 느껴지는 투박한 질감은 일기를 쓰고 있는 케이코의 복잡한 감정과 따뜻한 분위기로 마음을 끈다. 감독은 영화 전반에 걸쳐 케이코의 불안한 감정을 수화, 자막, 클로즈업, 음향, 거울을 통해 섬세하고 표현한다. 예컨대 동생과 수화를 주고받는 장면은 독특하다. 수화를 먼저 보여주고 뒤에 자막을 삽입한 쇼트는 무성영화를 연상시킨다. 이 표현은 그녀가 수화를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손짓에 어떤 감정이 담겼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바꿔 말해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 그대로 비언어적 형태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의 일관된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듬과 활기를 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케이코의 일기를 목소리로 전달하는 내레이션 부분이다. 이 변주는 지금까지 영화전개와는 다르게 말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기술장치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기의 목소리가 회장의 부인으로 보이지만, 카메라는 작은 이질감을 표현한다. 글 읽는 소리와 부인의 입모양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시종일관 시계방향으로 흐르던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전환되는 순간에는 목소리마저 바뀐 것처럼 들린다. 이때 누군가는 그 목소리가 케이코로 느껴질 수도 있다. 비록 목소리의 주인공이 케이코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빠졌다 나온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매일 써 내려간 일기와 꽉 채워진 체육관 출석부처럼, 소소하고 느리지만 꾸준하게 쌓아 올린 그녀의 삶을 카메라는 따뜻한 시선과 연대로 담아낸다. 

케이코는 줄곧 말이 도구가 되는 소통에서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기가 읽히는 순간만큼은 세상과 소통하며 주변과 연결된 판타지를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동생의 여자친구에게 복싱 자세를 알려주고 춤 동작을 배우거나, 완벽히 성공한 복싱 콤비네이션 같은 일상들이 그토록 감동적인 것은 그 속에서 세상과 연결된 그녀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회장과의 훈련>

케이코는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상실감.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주는 허무함으로 복싱을 그만두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끔 이유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삶의 이음매를 돌아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영화는 하루하루 묵묵히 삶의 중력을 견디어 내는 케이코와 다르지 않을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마지막, 케이코는 복싱 경기에서 패배를 안겨준 상대 선수에게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다. 그녀는 그 찰나의 우연으로 다시 일상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나아갈 것이다. 마치 기차와 강물이 흘러가며 어딘 가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감독의 말처럼, 시간을 들여서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영화는 그런 시간과 일상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우리의 말이 닿지 않는 곳, 언어로 풀기 어려운 깊은 방식으로 말이다. 

<강변의 회장과 케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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