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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뱅커 Sep 24. 2024

<새벽의 모든> : 공기의 진동과 파도의 파동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영화 속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의 첫 대사는 영화의 리듬을 타고 관객의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드는 질문 같다. 누구나 고독과 고통의 시간을 맞이할 때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삶은 가끔 공허하며, 그 과정에서 누구나 마음의 깊은 골짜기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관계의 연결 고리들이 있기에 그 틈은 메워지고, 희미하게나마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삶에 큰 위로가 된다. 

<새벽의 모든>(미야케 쇼, 2024)은 PMS(월경 전증후군)를 겪는 후지사와와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보통 남녀 주인공의 관계는 로맨스로 발전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전형적인 길을 따르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지속될 수 있는 관계, 강요나 희생 없이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영화는 두 사람을 남녀 관계의 틀에 가두기보다, 서로를 통해 성장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그리며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영화는 관계의 필요성과 진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공기 중에 흩날리는 미세한 먼지처럼, 담담하고 섬세하게 일상 속에서 쌓여가는 관계의 리듬을 담아낸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관계의 형태보다는 그 안에 깃든 진심과 배려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야마조에의 말처럼 '남녀 사이 우정이 있다. 없다'에 대한 논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돕고 이해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야마조에가 후지사와를 돕는 것은 그녀가 PMS로 겪는 고통이 타인에게 분노로 표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후지사와의 상태를 항상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야마조에는 그녀를 어떻게 살펴본다는 것일까. 영화는 이 질문에 두 사람의 일터를 배경으로 답을 제시한다. 두 사람이 일하는 곳은 현미경과 망원경을 제조하는 회사다. 야마조에는 후지사와의 상태를 현미경처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도, 때로는 거리를 두고 망원경처럼 넓은 시각으로 그녀를 지원한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감독은 이러한 과정을 전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보여주었던 기록 영화적 화법을 통해 풀어간다. 영화는 두 사람의 연대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두 사람뿐만 아니라 직장 구성원들과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까지도 세심하게 묘사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하게 변화하고,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이렇게 영화는 언어와 서사의 설명 대신, 잔잔한 일상을 통해 두 사람과 주변 인물들 간의 적절한 거리와 관계 방식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관객 역시 마치 현미경과 망원경을 번갈아 사용하듯, 두 사람의 세밀한 일상을 관찰하게 되고, 그 장면을 통해 공존과 연대,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깊이 느끼게 된다.


결국 영화가 그려내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은 선들이며, 그 선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서로를 잇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새벽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주의 별자리는 80여 개 종류가 있다고 한다. 영화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그 별자리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니지만, 다른 차원의 사랑처럼, 서로를 도우며 지탱하는 야마조에와 후지사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영화 속 인공 이글루 안에서 펼쳐지는 별자리 장면이 그토록 감동적인 이유도,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깊이와 부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감동적인 별자리의 시작은 과거, 그들의 회사 선배가 정성스럽게 기록한 메모와 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시간이 쌓여 현재를 비추듯, 우리가 맺는 관계는 단지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까지도 이어진다. 결국 영화는 시간과 관계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담아낸다.

요컨대 우리가 지금 보는 베텔게우스의 빛은 사실 500년 전, 대항해 시대의 선원들이 길을 찾기 위해 올려다보던 그 빛이다. 과거가 현재를 밝히듯, 이 영화는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현재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지만, 그 현재는 과거의 시간들이 겹겹이 쌓인 층위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드러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치유되고, 새로운 빛을 찾을 수 있다고 위로한다. 밤이 있기에 우리는 무한한 세계를 꿈꿀 수 있고, 늘 그렇듯 새로운 새벽은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감상한 누군가는 영화 속 잔잔한 일상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정화되고,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500년 전의 빛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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