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적인 미완성
전쟁의 상흔을 뒤로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의 환희로 가득한 표정과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와 대조적으로 화면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은 그의 꿈과 현실도 뒤바뀌어 하강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을 전한다. 프롤로그는 라즐로의 굴곡진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메타포로 기능한다. 영화는 마치 거대한 마천루처럼, 215분의 압도적인 대서사를 쌓아 올린다. 또한, ‘프롤로그, 1부(도착의 수수께끼), 2부(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 인터미션, 에필로그’로 구성된 영화의 구조는 건축물의 조형 원리와 닮아 있다. <브루탈리스트>는 이민자 출신 건축가의 일대기를 따라가지만, 영화 자체가 건축의 특성을 내재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형식적 실험을 넘어, 그 구조가 이야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라즐로의 일대기를 단조롭게 나열하는 대신, 각 에피소드는 공간을 조각하듯 섬세하게 묘사한다. 마치 건축 설계자가 빛의 각도와 자재의 미묘한 질감까지 신경 쓰듯, 영화도 디테일을 치밀하게 구축한다. 또한, 각 사건 사이에 대칭되거나 반복되는 촘촘한 연결 고리의 만듦새는 감독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1부에서 라즐로는 매춘부와 밤을 보내지만, 직접적인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때 포주는 그에게 남성도 가능하다고 넌지시 제안한다. 이후 미국 정착을 돕는 사촌으로부터 “웃음을 팔아라”라는 말을 듣는 장면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아내(펠리시티 존스)의 잠자리 요구에 응하지 못한 채, 유사 성행위를 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반복적인 성적 장면들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남성성을 잃어버린 라즐로의 상흔을 부각하며, 궁극적으로 영화 속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쌓여가는 서사의 조각들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시종일관 세밀한 묘사만으로 관객을 한낱 관찰자로서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디테일한 연출 속에서도 몰입감을 유지하며 긴장감을 유도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시청 관계자들 앞에서 라즐로가 헤리슨(가이 피어스)의 의뢰를 받은 문화 센터 건축물(모형)을 설명하는 순간이다. 라즐로가 강조하는 것은 건물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손전등을 이용해 시연하는 라즐로나 건축 모형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웅장한 음악과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헤리슨을 천천히 줌-인한다. 즉, 관객에게 완성된 건축물의 모습을 직접 제시하는 대신, 그것을 바라보는 인물의 반응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이중적인 영화 장치를 활용한다.
이렇듯 영화는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지어진 브루탈리즘 건축물처럼 견고하게 쌓여간다. 하지만 영화가 요체로 삼는 건축적 구조는 따로 있다.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영화 속 문화센터 건축물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채, 이야기는 에필로그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 결말을 두고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은 불만을 표한다. 이들은 에필로그가 영화의 최대 단점이라고 지적하며, 그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리슨의 갑작스러운 실종, 아내의 죽음, 그리고 휠체어를 탔던 아내처럼 스스로 서 있을 힘을 잃은 라즐로까지. 2부까지 촘촘하게 쌓아 올린 서사가 뚜렷한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일부는 이를 의도적인 서사 공백으로 해석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는 지나치게 길어진 러닝타임을 감안한 편집 결정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215분이라는 러닝타임에 인터미션까지 도입한 영화에서 20~30분이 더해진다고 문제가 될 리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에필로그가 단순히 부가적인 요소가 아니라 영화의 전체 구조를 완성하는 필수 장치라는 점이다. 한 단계씩 쌓아 올려 탄탄한 구조물을 완성하듯, 영화의 정교한 구성 방식이야 말로 <부루탈리스트>가 상찬 받아 마땅한 이유다. 일부 관객과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감독 역시 2부에서 마무리 짓는 방식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필로그를 추가해 영화 자체를 하나의 건축물처럼 완성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에필로그야 말로 라즐로가 설계한 건축물의 천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감독의 예술적 고집이자, 영화적 '천장'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가 라즐로의 건축 철학을 반영하는 방식이다. 라즐로는 영화 속에서 건축물의 천장을 강조하며, 천장이 빛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공간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브루탈리스트>의 에필로그는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영화의 본질을 조형적으로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요컨대, 영화 속 미완성된 문화센터가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남듯, 영화 자체도 하나의 미완성된 형태로 남겨져야 비로소 그 조형적 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그 누구도 아닌 라즐로가 꿈꿨던 건축물 자체가 된다. 이는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하다”라는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미완성이야 말로 이 영화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형태이며, 영화 속 문화센터와 <브루탈리스트>라는 영화 자체가 서로를 투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서사 이상의 조형적 의미를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