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Night
“고통스러운 표정이 좋아, 그게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에.” 영화 <봄밤>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241」의 첫 구절이다. 이 영화는 제목이 주는 낭만적인 인상과는 달리, 사랑의 따뜻함 이면에 존재하는 고통과 결핍에 주목한다.
영화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인 영경(한예리)과 심각한 류머티즘을 앓고 있는 수환(김설진)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의 사랑은 상처와 고통 위에서 움튼다. 그들의 절박한 감정은 필름 위에 얹혀 시적인 운율을 만들어낸다. 요컨대 문학적 감수성이 시청각 언어로 전이되는 체험,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특별한 감흥이다.
그들의 첫 만남은 한 결혼식의 피로연이다. 사랑의 결실을 상징하는 결혼이라는 전통적 장치를 배경으로 삼지만, 카메라는 이 순간을 마치 장례식처럼 담아낸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고, 사람들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연신 술을 들이켜는 영경의 멍한 표정과 그녀가 수환을 바라보는 눈빛을 조용히 붙잡는다. 수환이 취한 영경을 업고 그녀의 집에 데려다 주는 순간, 영경의 얼굴엔 고통과는 결이 다른 미묘한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각자의 삶 밑바닥에 떨어진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상대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경의 알코올 중독과 수환의 류머티즘은 사회적 시선에서는 '결함'이지만, 이들에게는 오히려 가장 순수한 자아를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디킨슨이 "고통스러운 표정이 좋아, 그게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에"라고 말했듯이, 고통 앞에서 인간은 가면을 벗고 진실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 속에서 꾸밈없는 진정성을 발견했고, 그 벌거벗은 영혼의 순수함에 마음을 열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런 사랑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믿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 사랑을 말로 증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 대신 이미지 전환의 리듬, 침묵과 여백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술집에서 두 사람이 각자의 아픔을 털어놓는 장면이 그렇다. 대화는 중간중간 암전으로 생략되지만, 관객은 중요한 말을 놓쳤다는 느낌이 아닌, 오히려 그 침묵이 의미를 읽어내게 된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두 사람의 개별적인 시간을 하나의 공유된 순간으로 압축하는 역할을 하며, 몽타주 기법은 생략된 말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진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흘려 보내는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여백을 채우게 만든다. 이러한 편집은 문학적 운율처럼 작용해 영화 전체의 리듬을 형성하고, 관객은 그 흐름 속에서 시를 읽듯 감정의 결을 따라간다. 이 시적 리듬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김수영 시인의 동명 시「봄밤」이다. 영경이 술을 마실 때마다 읊조리는 이 시 구절은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그녀의 심리적 고통을 대변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처음에는 파멸로 향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 되면서 오히려 버텨내기 위한 몸부삶에 매달리는 행위처럼 읽힌다. 즉 ,절망적이면서도 간절한 삶의 의지인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경에게 고통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증거처럼 작용한다. 그 고통은 그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녀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래서 그녀는 시를 통해 자신을 다독인다.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고,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올라도 당황하지 말라." 이 시구는 그녀에게 일종의 주문이 된다. 영경은 술을 마시며 고통을 마비시키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녀에게 술은 도피가 아니라 버텨내기 위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그 고통은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영경이 쓰러지고, 수환이 다시 일으켜 업고, 술을 마시러 떠난 영경을 수환이 기다리고, 또 영경이 쓰러지는 장면들이 시의 반복 구조처럼 영화 전반을 감싼다. 배우들의 육체는 이 고통을 형상화한다. 잡목처럼 뒤틀리고 거칠게 자란 듯한 그들의 몸짓은 무언의 언어가 되어 관객의 마음속으로 침투하고, 마침내 시퍼런 멍으로 남는다.
영화에서 가장 문학적인 – 동시에 초현실적인 – 장면은 술에 취한 영경이 목련나무 아래에서 흘리는 눈물 장면이다. 목련은 마치 눈물을 매단 것처럼 피어 있고, 그녀의 울음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운율의 클라이맥스처럼 다가온다. 그 울음이 슬픔인지, 감정의 혼란인지, 혹은 끝내 이뤄지지 못할 사랑에 대한 예감인지 해석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울음이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닿는 방식이다.
영화의 마지막, 수환을 떠나보낸 영경의 시야에 포착된 한 소년의 모습은 따라오라는 듯하면서도 어디론가 쫓기고 있는 듯한 이중적 인상을 남긴다.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김수영 시인의 시「봄밤」의 마지막 구절이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이 장면을 끝으로 <봄밤>은 사랑과 고통, 절망과 생존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던 한 존재의 삶을 시로 완성한다. 그렇게 영화는 문학을 닮은 운율 속에서, 봄밤이라는 이름의 긴 울음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읊조린다.
※ 본 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활동 당시 작성한 영화 <봄밤> 리뷰 「봄밤 : 시가 된 순간, 영화가 된 감정」을 정식 개봉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