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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뱅커 May 16. 2024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슬프도록 아름다운 첫사랑의 서시


첫사랑의 달콤하고 까끌까끌한 기억

매년 특정 시기가 오면 연례행사처럼 챙겨 보는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7, 이하 ‘콜마넴’)도 그중 하나다. 영화 속 엘리오(티모시 살라메)는 80년대를 살아가는 음악을 사랑하는 소년이다. 내가 엘리오의 나이 즈음은 90년대였다. 나는 특히나 90년대를 추억하고 사랑한다. 아마도 90년대의 문화나 정서가 특별하게 좋았다 보다는, 영화 속 엘리오 처럼 복숭아 같이 달콤하고 까끌까끌한 첫사랑의 맛을 기억하기 때문 일 것이다. 그 시절 그 연약한 감정의 파도와 함께한 음악과 영화, 책은 아직도 내 삶과 정서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제 불혹을 넘겨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여름의 시작점에서 다시 한번 <콜마넴>을 본다. 영화란 참 신비로운 예술이다. 분명 영화는 그대로인데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든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의 90년대와 첫사랑, 그 시절 늘어질 대로 늘어진 테이프로 밤새 듣던 신성우의 <서시>와 김성면(K2)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같은 음악이 이 떠오르는 것은 비정상일까.

복숭아와 같이 달콤하고 까끌까끌한 첫사랑의 기억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었던

이 영화는 ‘엘리오’ 에게 인생이라는 커다란 서사의 서시(序詩)다. 이 영화를 굳이 퀴어 영화로 분류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그냥 아주 특별한 사랑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는 동성 간의 사랑. 누구나 한 번은 겪는 첫사랑. 고대부터 셰익스피어, 헤밍웨이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회자되어 온 이 사랑이야기가 뭐가 그리 다를 게 있겠냐 만은 이 영화는 분명 아름답고 특별하다.

영화 속 두 사람 대화 중 ‘사랑해’라는 말은 없다. 아마도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라는 섬세하고 애틋한 감정을 ‘사랑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엘리오와 올리버. 서로를 향한 그 감정의 애틋함이 얼마나 깊어야 상대의 이름으로 불려 지기를 바랄까. 내가 엘리오 나이 즈음 즐겨 듣던 <서시>(신성우)의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었던’ 이란 노랫말이 지금처럼 와닿을 때 가 없다. 플라톤의 <향연> 속 내용처럼 하나로 붙어 있다 떨어진 육체가 하나라고 느끼는 감정.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며 느낀 그 농익은 감정의 일체감. 찬란하고 아름다운 햇살과 호수에서의 수영, 야외에서 맞이하는 스파클링 와인 한잔과 식사,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과 다정한 사람들. 이 보다 더 아름답고 특별한 첫사랑의 경험이 존재하기는 할까.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이젠 다른 삶 인걸 알아. 우린 같은 추억 간직한 채로.
서로 사랑했던 날만큼 아파하며 잊혀 버릴지도 몰라.
아냐. 기쁜 젊은 날의 내 사랑. 어떻게 널 잊을 수 있어.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우리 지난날의 사랑아”

역시 나의 90년대에 즐겨 듣던 음악의 한 소절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만약 이 영화 제목을 새로 짓는다면 딱 어울리는 문장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이 특별한 첫사랑의 소중함을 지켜준 엘리오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다. 영화 종반 엘리오의 아버지는 슬픔에 질식되어 가는 자식에게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그 기쁨과 함께.”라고 자식의 사랑을 위로한다. 우리 몸과 마음에게 단 한 번 주어지는 첫사랑의 슬프도록 아름다움을 간직하라고 말이다. 영화는 엘리오의 아버지 말처럼 ‘나이가 들수록 몸이 닳듯 마음도 닳는’ 이 시기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소중한 그 순간을 다시 소환하여 끄집어 내게 한다.

사랑의 모양

앞서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 분류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사랑은 여러 종류의 모양을 가진다. 이성 간의 사랑 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 반려동물과 인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등. 우리는 수천수만 가지 감정의 신경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 대중가요의 제목처럼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의 모양은 다를 수 있지만 그 혐오와 관점을 걷어내고 한 걸음 뒤에서 본 다면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사랑의 의미는 같을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퀴어 영화라 정의하지 않고 ‘특별한 첫사랑’ 이야기라 정의하는 이유다.


앞서도 말한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평생 헤매는 까닭을 언급하고 있다. 본래 인간은 남성, 여성, 자웅동체 이렇게 3개의 형태를 가졌으며, 각각 두 개의 몸에 하나의 영혼이 깃든 존재라 설명한다. 즉, 인간은 두 개의 육체가 붙은 채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 인간은 이후 신을 공격하면서 그 형벌로 몸이 나뉘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자신과 한 쌍이었던 영혼의 반쪽을 찾아 떠돌게 됐다는 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언급한 사랑의 근원이다. 이 이야기에 비춰 보면 수천 년 전에는 이성애 만큼이나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인 것이다. (출처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http://www.kihoilbo.co.kr)


그래서 더욱더 이 영화를 논 할 때 동성애코드는 불필요하다. 다만 서로의 반쪽을 처음으로 찾은 한 소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서시 일뿐이다. 그 유명한 복숭아신에서 올리버의 말처럼 모든 사랑 영화가 이 정도만 역겨운? 이야기라면 언제든 좋다.

봄의 살랑거리는 바람이 뜨거운 햇살로 바뀌는 여름이 오면 복숭아 같은 첫사랑과 나의 90년대를 떠 올리며 끄집어 낼 영화이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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