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엽기적 초상화
힘들고 괴롭기만 한 우리의 인생,
다들 어떻게 살고 계시나요?
잘 지내고 있죠?
아니면,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걷지는 않나요?
희망을 꿈꿀 여유도, 시간도 없어서,
오늘만 산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건 아니겠죠?
그건 원빈이나 가능하답니다.
아무리 힘든 인생이라도,
히든카드 하나쯤은 남몰래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한 후,
때가 올 때까지 존버해야 합니다.
아무리 못나고 좌절로 점철된 삶을 살아도,
잘 준비된 히든카드만 있다면,
그 승부는..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닌 것!
MLB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수, 요기 베라의 말이지만,
삶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명언입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히든 카드를 놓지 않았던 사람을 살펴보죠!
영화 '내부자들'의 이병헌.
라면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의
개수모를 당했지만,
히든 카드인 USB 파일을 간직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죠.
젊은 나이에 프랑스, 독일 두 강국의 지배자가 된 두 청년.
하지만 운명은 잔인했으니..
서로 강력한 라이벌이 됩니다.
하지만 포로가 되는 등
평생 넘사벽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일반적으로 당하며,
주색잡기와 같은 한량스러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수아 1세!
로마제국 황제 이후,
최대의 영토를 소유했다는 카를 5세는
신대륙마저 진출하며,
원조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데...
그런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수아 1세가 한 짓이란
다름 아닌 유럽 공동의 주적인 이슬람과의 동맹!
욕은 욕대로 먹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죠.
열받은 프랑수아 1세는 결국
예술이나 후원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 밖엔
딱히 할 게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만난 노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에게 노후를 제공하며,
인류의 대 천재가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다빈치는 그 보답으로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유산으로 남기죠.
그 이후, 예술의 예도 모르는 많은 관광객이
모나리자, 단 하나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옵니다.
17유로 입장권과
수많은 파생 비용까지 합치면...
프랑수아의 후손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혹은 마르지 않은 샘,
아니면 평생 연금 복권을 가진 셈입니다.
당대 최강,
카를 5세의 운세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가 힘들게 이룩하고자 했던 과업은
결국 시대 흐름과 어긋나는 것.
곧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했을 정도로
인류 최고의 럭키가이 이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매우 초라하죠.
분명 인생의 실패자는 프랑수아 1세이지만,
비장의 히든카드를 통해,
그가 후손들에게 남긴 선물은
30년 전 삼성전자 주식만큼이나
정말 복덩어리입니다.
오늘 소개할 사람도 생존 당시 무능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황제입니다. 1576년 10월 12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루돌프 2세가 그 '실패자'이죠.
앞서 언급한 카를 5세의 후손인데, 외모만 딱 봐도 그 포스가 전혀 다릅니다. 왠지 마동석프랑수아 1세의 후손이 아닐지 의심이 가는 외모입니다. 심지어 이름도 산타에게 영원히 혹사당하는 사슴 이름...
그에 맞게 잃어버리기만 했을 뿐 쟁취했던 것은 없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죽기 전 동생한테 황제 자리마저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딱히 나라가 멸망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 없이 잊힐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수많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유서 깊은 합스부르크. 아이돌이 어찌나 많던지, BTS와 같은 대박을 치거나 빅뱅처럼 온갖 범죄와 불성실한 군 복무로 여러모로 화제가 되지 않는다면, 듣보잡이나 마찬가지인 가요계 상황과 비슷했죠.
그러나 이 분 역시 비장의 히든카드를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좋은 놈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수 없다면, 나쁜 놈, 이상한 놈도 나쁘지 않죠. 그런 식으로 주목도 받아야, 그나마 관심도 받을 것이고, 어느 순간 때가 오면, 나쁜 짓, 이상한 짓을 재평가 받죠! 그렇다면 무능력한 황제의 히든카드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썩기 직전의 바나나마저 고가의 예술 작품이 되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아도, 가히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유념해야 할 점은, 아무리 허당이라고 해도, 지체 높으신 황제 초상화라는 것~!
물론 황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화가가 이런 식으로 엿 먹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원한이 가득 쌓인 화가가 아니라 반대로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궁정 화가가 직접 그린 것입니다.
바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궁정화가의 위상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스페인 궁정 화가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유명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어린 공주가 중심에 있고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시녀, 개그 담당인 난쟁이와 애완견이 주변에서 서포트하고 있죠. 화가는 거대한 컨버스 앞에서 그림 속 모델을 관찰하고 있는데, 그 모델은 뒤편 거울로 흐릿하게 보이는 왕과 왕비입니다.
왕 부부를 병풍 취급하는 궁정 화가의 위상
마치 지금의 360도 카메라처럼, 사방에 있는 인물들을 담고 있습니다. 총 3개의 장면이 한 공간에 압축되어 있는 서양 미술의 정수이죠. 지금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이 그림 앞은 관광객으로 바글바글합니다.
여기까지 작품에 대한 분석이고, 우리가 지금 생각할 부분은 궁정 화가의 위치와 권력입니다. 왕과 함께 살다 보니, 왕실의 사생활까지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권력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실세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죠.
남자의 급소가 없음에도 하루 종일 황제 옆에 있다 보니, 실제로 명나라 환관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습니다.
또 다른 궁정 화가 루벤스는 국제적으로 너무나 핫하여, 외교관 업무 또한 맡았을 정도.
왕래가 힘들었던 과거, 왕족 간 혼인을 주선하던 외교관이 꼭 들고 갔던 소지품이 바로 궁정 화가가 그린 중매 대상자의 초상화이었습니다. 궁정 화가의 가장 큰 업무이기도 했죠. 자칫 실제보다 못생기게 보이면 혼담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추하지는 않되 심한 과장 없이 뽀샵 처리하여 그려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던 만큼 실력만큼은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수적인 왕실에서 일했던 만큼, 너무 파격적인 스타일을 선보일 수는 없었죠.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기괴한 그림에서 보듯, 당시에도 살짝 돌 + I 같은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궁정 화가의 신분이라면, 신사답게 행동해야죠.
주세페의 다른 그림에서 보듯이, 화풍 자체가 원래 이런 듯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그를 가까이하고, 나중에 백작 작위까지 준 것을 보면, 루돌프 2세의 예술적 취향 또한 이런 변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죠.
다빈치, 렘브란트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예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그저 예쁘다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그의 작품은 괴상할 뿐입니다.
하지만 마치 도살장 풍경을 그린 듯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혐오스러운 작품에서 보듯, 예술의 아름다움은 그 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예술에서도 '외모지상주의'적 감상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의 작품은 동시대에 꽤나 인기가 많았던 것인지, 무능한 루돌프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시작된 '30년 전쟁'에서 그만 독일이 스웨덴에게 탈탈 털리고, 그 전리품으로써 스웨덴 군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작품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변방에 있다 보니, 오랫동안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게 되었죠.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도는 법. 혹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오는 법. 사진 기법의 발달로 그림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고, 인상주의 이후 사실상 기교적 측면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지라, 현대 미술은 급격히 변화합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그리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
물론 대중들은 아직도 고흐의 그림에 열광하지만,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는 고흐의 그림이라 열광하는 것일 뿐, 지금 시대의 화가가 고흐 스타일대로 그린 그림은 별개이죠. 딱히 이름도 모르는 화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차라리 고흐 작품을 정교하게 인쇄한 아트 프린트를 소장하고 싶어 합니다.
예술가의 창조성 여부를 떠나, 예술가 생계문제가 달린 중요한 문제이죠. 관심이 없으면,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지 않고, 작가는 굶어야 하기 때문. 그 결과 현대 미술은 사진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새로운 영역으로 발전합니다. 아니, 발전할 수밖에 없었죠.
그중 대표적 예술이 바로 초현실주의!
달리의 작품이 대표적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은 예술 사조이지만, 꿈속에서 보던 어느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달리와 같은 작품만 초현실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굉장히 정적이지만, 현실의 미묘한 부분을 비틀며 실제로는 매우 동적인 감상을 해야 하는 마그리트 작품 또한 초현실주의이죠.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받나요?
채소, 통닭 등 사물들을 독특한 배치하여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선사하는 주세페 아르침볼도 그림의 본질은 마그리트 작품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시대를 앞선 주세페의 그림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지만, 초현실주의 등장 후 초현실주의 대가인 피카소, 뒤샹의 재평가를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그와 동시에, 암군이었던 루돌프 또한 주세페의 대표작을 통해 이름이 꽤나 유명해집니다. 그런 것을 보면, 다빈치를 존경했던 프랑수아 1세와 마찬가지로 루돌프 또한 정치에 재능은 없었지만, 예술적인 감각은 나름 있었나 봅니다.
이러한 안목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조용히 사라질 뻔했던 그는 불멸의 이름을 얻었죠.
흔히 예술의 도시로 파리가 유명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었던 빈도 만만치 않습니다. 유럽에서 손꼽히는 가문이 지배한 도시답게, 그들이 수집하고 후원한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클림트의 '키스'가 있는 벨베데레 미술관만 다녀오지만, 정말 알짜 작품은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다 있습니다.
세계 일주를 하며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처럼 유명한 미술관은 모두 가 보았지만,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풍부한 문화적 자산 속에서 금수저 루돌프 2세 황제가 자랐던 만큼, 예술적 안목이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맨날 보던 '흔한' 예술 양식에 질렀고, 그 결과 주세페의 독특한 스타일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뼈대 있는 집안답게, 원래 가문이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의 큰 할아버지 카를 5세는 티치아노가 붓을 떨어트리자, "티치아노 정도의 거장이라면 기꺼이 황제로부터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지!"라는 말을 하며 직접 붓을 주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이 많은데,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왕 펠리페 2세(루돌프 큰아버지) 본인 궁정에서 감상하기 위해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높은 예술적 소양을 갖춘 펠리페 2세 역시 뻔한 예술에 질렸고, 그 결과 주세페만큼 개성이 강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남자의 의외의 취미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하지만 보쉬와 펠리페 2세는 같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보니, 지금 남아있는 펠리페 2세의 초상화는 여타 초상화처럼 평범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동원해 영국을 침략하려다 패배한 사건으로 여러 번 까이고 있기 때문에 굳이 괴상한 초상화로 일부로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겠죠?
게다가 필리핀 이름이 당시 이곳을 첫 발견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꽤나 대중적인 왕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 가문의 웃어른이었던 펠리페 2세의 궁전에서 루돌프는 민감한 사춘기를 보냅니다. 훗날 그의 독특한 예술 취향을 보면 보쉬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하죠. 보쉬에 영향을 받은 루돌프의 취향은 단지 초상화만 남긴 게 아닌데...
루돌프 황제는 제위 중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를 빈에서 체코의 프라하로 옮깁니다. 원래부터 작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세계의 중심이 된 적이 없었던 프라하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 결과 황제가 거주하는 도시가 된 프라하는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수준 높은 문화적 취향 덕분에 프라하는 관광지의 관광지가 되었지만, 사실 프라하에서 루돌프의 이름을 쉽게 만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루돌프가 후원했던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의 흔적을 더 쉽게 만날 수 있을 정도.
무능한 황제를 딱히 기억해봐야 좋을 게 없으니..
루돌프의 전당이라는 뜻의 루돌피눔(Rudolfinum)이 있지만, 그 이름도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의 주인공인 다른 루돌프에서 유래했습니다.
역시나 유럽 역사에서 지겹도록 등장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지만, 다만 그를 기념하는 동상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은데.. 가족 간의 불화로 생긴 스트레스로 인해 불륜 관계인 17살 소녀와 동반 자살하며 집안 이름을 먹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 괘씸죄 때문에 오히려 프라하 발전에 힘쓴 '황제 루돌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하죠.
아무튼 '황태자' 루돌프가 최악이라 그나마 '황제' 루돌프 이름이 하나 있는 건물이 있지만, 황제 루돌프 또한 워낙 무능하여, 얽히는 걸 피하는 게 오히려 좋을 정도. 오히려 프라하를 수도를 만든 루돌프를 배신하고 그의 동생을 지지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루돌프는 동생에게 프라하 성에 감금되어 죽습니다.
솔직히 딱히 언급할 필요도 없는 황제일 뻔했지만, 아무튼 주세페 덕분에 이런 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좋은 쪽으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루돌프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이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오히려 주세페로 인해 괜히 조용히 지옥에 있을 망자가 영원히 고통을 받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