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국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가 사법개혁에 성공할 것이라고 더더욱 믿지 않는다.
하지만 기자와 조국 후보자의 말 중 누구의 이야기가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조국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수준을 눈으로 목격했고 그들이 하루에도 수차례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더이상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 기자들은 앵무새였다.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만을 듣기를 원했다. 답이 나오지 않자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답이 나와야만 후속 질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답을 듣기 위해 기자들은 앵무새가 되어야만 했다.
둘째, 기자들은 흔힌들 문빠나 문까들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중립적 위치에서 사실을 평가하지 않았다.
지나친 '확증편향'만 보였다. 원하는 정보만 수집했고 그 반대 사실은 확인하지 않았다.
기자는 마치 진영논리에 빠진 정치꾼처럼 보였다.
셋째, 기자는 잘난척쟁이처럼 보였다. 전국민이 지켜보는 생중계 화면에서 장관 후보자를 상대로 질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늘 조연에 머무르던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보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국민들이 보는 기자 회견에서 있어 보이는 전문용어를 사용하며 조국 후보자를 향한 질문을 했다. 내용을 숙지하지 못해 핸드폰에 적은 내용을 읽어가며 질문했다. 기자들은 자기 스스로 수준 높은 질문을 했다는 만족감 때문인지 조국 후보자의 답변은 듣지 못했다. 100분 토론의 시민논객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면, 기자들의 모습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자들은 조국 후보자를 이기지 못했다. 자신들은 열심히 싸웠고 충분한 반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내가 본 기자들의 수준은 딱 거기까지였다. 북미협상 관련 신속한 정보 전달은 네티즌 수사대보다 떨어졌고 외국의 지도자를 향한 질문 요구에는 침묵했다. 국내 정치적 현안은 미친듯이 달려들어 사실 관계 확인없이 음모론을 전달했다. 기사의 수준은 일개 유튜버들과 차이가 없었다. 언론인이라는 소명과 실력도 없는 그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해 줘야 할까.
조국 후보자는 기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달콤하지 안했다. 수준미달의 기자들과 싸움에서의 승리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청문회의 필요성만 더 커진 형국이다.
조국의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지적허영심에 빠져 사실을 바라보지 못한 기자들의 실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