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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Jan 05. 2024

[서평]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 에세이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날 책



[책 소개]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작품을 관람하였던 저자의 에세이를 읽다 보니 해외에서 머물며 특정 장르의 예술만 골라 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하드록을 부르는 젊은 록밴드의 단독 콘서트나 조롱에 가까운 풍자가 멈추지 않는 뮤지컬처럼 하나같이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일이 없는 공연을 젊은 체력을 담보로 퇴근 직후에 일부러 보러 갔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들은 이들과 전혀 결이 다르다. 교양 수업 시간에 잠깐 들었던 유명한 오페라 작품이나 그보다는 훨씬 더 낯선 제목의 공연이 다수 소개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생소한 작품들이 다수 소개되었음에도 저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 읽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책을 넘길수록 한 예술 작품, 그리고 그 예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낯설지만 수려한 방식으로 표현한 문장 구조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뮤지컬, 연극과는 어떤 접점도 없는 사람으로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즐거움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예술에 대한 저자의 애정, 그리고 예술을 기반으로 한 삶의 성찰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옆자리에 앉은 모르는 아저씨에게 무료 티켓을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챕터, '장 끌로드 아저씨'이다. 




'한 장르를 다른 사람에게 빚질 수 있을까'라는 기막히게 훌륭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챕터는 단순히 좋은 작품을 낯선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는 장 끌로드 아저씨의 순수한 호의, 그리고 무료 티켓을 건네준 것만으로도 모자라 더 나은 자리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빈자리를 물색해 주는 아저씨의 수고스럽고도 열정적인 노력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현실과는 다른 낭만적인 세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 그 작품이 상영되는 공간, 자신과 함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과의 거리 등 작품 밖의 세계로도 시야를 확장한다. 



'공연 보러 갈까,라는 말속에는 풍경이 밀려든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몇 가지 순간이 떠올랐다. 무대와의 간격이 겨우 세 줄밖에 되지 않는 곳에 앉으면서, 그들의 몸짓이나 노랫말만큼이나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장면, 사람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무대 아래에는 오케스트라가 열정적으로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던 장면.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중년의 백인뿐이어서 초대받지 않은 곳에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장면.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만날 때에도 늘 떠올렸던 평범한 생각이니 기죽지 말기를 선택했던 장면. 




그러나 그다음번에는 백인 남성 주인공이 아닌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가진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보러 가게 되었고, 그러자 입장할 때부터 나갈 때까지 이제야말로 친근한 초대를 받았다는 기분에 휩싸였던 장면. 다양한 인종, 모두 다른 개성, 남들과 똑같아질 이유를 굳이 찾을 필요 없는 사람들 속에서 안락함을 느꼈던 장면. 




공연을 통해 접한 서사와 노래뿐만 아니라, 공연장을 둘러싼 사람과 환경 또한 어느 한 시절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마지막 챕터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저자는 말한다. '모든 것을 알아도 문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 말의 발설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을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봐도, 심지어 어떤 작품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아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인데 그런데도 굳이 시간을 들여 예술을 감상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위 문장이 답이 되지 않을까. 




예술이 잊힐 걸 알면서도 눈에 담는 이유는 예술을 삶에 들이는 시간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스토리, 넘버, 출연진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작품을 보러 온 구성원 때문에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작품을 직접 보지 않으면 영영 느낄 수 없으니까. 공연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 또한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을 때 이 책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 같다.





[문장 수집]



어떤 사건들의 백 년 단위 기념일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단지 요행으로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기회는 한 번뿐이다. 운이 좋다면 나는 당신의 백 주년을 살아 한 번만 축하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제때에 지나간다면. (물론 그러기 위해, 그에 앞서 우리는 이미 서로를 제때에 놓쳤어야 한다. 동시대를 살지 않았어야 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당신을 영원히 미화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한 장르를 한 사람에게 빚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사는 동안 사람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처음 맛보게 해준 과일을 철마다 찾아 먹고, 누군가 들려준 문장을 슬픔의 어귀마다 만져보는 일. 나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한 시절 매우 고유한 방식으로 내 삶에 도래했다가 대개는 흔한 방식으로 멀어진,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준 것이 하나의 장르 전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일이나 시 자체일 수도. 




단지 넓어서가 아니라, 모든 구석의 팽창이 무한한 까닭에 몸은 우주가 된다. 춤을 추든 그저 살든,이라고 그가 표현한 것이 나는 좋았다. 춤을 추든 그저 살든, 감각의 시야를 넓히는 일만큼 우리에게 섬세한 기쁨을, 또 힘을 주는 것은 없다. 이때 감각이란 선명함의 문제다. 형태의 선명, 감정의 선명, 관계의 선명, 그것을 해치지 않은 채 우리 몸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아름답게 보이기보다 주어진 행위를 다하는 데 몰두하기.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나 아름다운 동물들처럼. 보는 일이 아닌 움직이는 일의 즐거움을 느끼기. 떠나보내고, 들여놓기. 말하자면 항복하기. 우주와 닿아 있기. 종국에는 당신에 대해서는 보다 덜,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이, 감각하도록, 아파하도록.




모든 것을 알아도 문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 말의 발설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야지만 당신을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을 당신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행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점]


아름답게 보이는 것보다 어떤 행동을 하고, 움직이는데 몰두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경험 쌓아보기

(춤, 운동, 손을 움직이는 취미 등) 





[답을 찾고 싶은 질문]


나는 누구에게 어떤 장르를 빚진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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