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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Jan 30. 2024

[서평]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 앞에 무엇을 남길지 고민될 때 읽어볼 책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모른척하고 싶은 사실들이 있다. 동양인은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나 전 세계는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는 불공평한 사실과 모두가 죽는다는 공평한 사실. 


이 중에서도 가장 외면하고 싶지만 가장 신경 쓰고 싶기도 한 사실은 바로 죽음에 관한 사실이 아닐까.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오래된 라틴어 문구를 착실히 따르는 사람보다는, 오랫동안 살아가는 걸 염두에 두고 야채를 먹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을 일상 속에서 자주 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죽음을 잊은 척 살아가더라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떤 모습으로든 찾아온다. 그런데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애초에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죽음을 앞두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장을 찾아온 주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자리가 자신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하는 모습, 장례식장을 나서자마자 카드놀이를 하러 가는 모습, 성호를 그어야 할지 절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 그리고 돈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까지. 


이는 모두 현실의 장례식장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책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얼굴에 '해야 할 일을 완수했다는, 그것도 바르게 완수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뒤를 이어 '그 표정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나무람과 경고도 담겨 있었다'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그럼에도 장례식장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일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며, 자기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다는 평범한 생각이 구원처럼 그에게 찾아왔다.



이 대목을 읽고 장례식장을 찾은 나는 어떠했는지 떠올려보았다. 그때의 나는 죽음 그 자체보다는 남은 사람의 삶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죽음이 진정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까. 잘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죽음보다는 삶 그 자체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장례식장을 찾은 주변인들의 묘사가 끝난 후, 책은 이반 일리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샅샅이 묘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는데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그래서 결혼마저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기 위해 적절한 조건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다. 


아내는 임신한 이후로 불평과 화가 늘어났고, 임신을 거듭할수록 불행해졌다. 그때 이반 일리치는 일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삶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올바른 모습만을 들여놓았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부터 공손한 대접을 받고, 자신의 업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품위 있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이반 일리치의 삶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대로 계속해서 흘러갔다. 유쾌하고 품위 있게.'




새로운 인사이동으로 인해 동료보다 두 단계나 더 높은 자리에 임명받고, 높은 연봉도 얻게 된 이반 일리치는 새로 이사 갈 집을 직접 꾸미는 일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고상하고 우아하고 천박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지나친 탓인지, 이반 일리치는 도배장이에게 어떻게 휘장을 걸쳐야 할지 몸소 시범을 보여주려고 사다리에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만다. 


다행히 틀 손잡이에 옆구리에 부딪혔을 뿐이고, 통증도 금세 가셨다. 하지만 '자기 인생이 마땅히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믿었던 대로 흘러'가는 와중, '옆구리의 통증은 점점 커지면서 안락하고 품위 있는 삶을 망쳐놓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 마땅히 흘러가야 한다고 믿었던 삶은 무엇이고, 금세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내 삶을 뒤흔드는 통증이 있다면 무엇일까. 


어쩌면 전자는 지금처럼 평범한 사람으로서 누리는 평온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순진한 생각, 후자는 건강에 대한 지나친 믿음 때문에 지속하는 파괴적인 습관이 아닐까 싶다. 늦게 자고, 야채 대신 간식 챙겨 먹기를 좋아하고, 운동하기보다 오랫동안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걸 선호하는 습관 말이다.


이런 건강하지 못한 습관은 스스로 만든 반면, '마땅히 흘러가야 한다고 믿었던 삶'은 타인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감도 높은', '힙한', '감각적인' 제품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눈에 자주 들어온 이후로 그들의 삶을 내 삶에도 들이고 싶은 순간이 많았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는 좋아하는 인센스 스틱을 피운 채 명상을 하고, 만년필 잉크에도 번지지 않는 질 좋은 노트에 일기를 쓰고, 품질 좋기로 소문난 이름난 브랜드의 운동복을 입고 필라테스나 조깅을 한 뒤, 음질 좋은 스피커와 연결된 LP 플레이어로 잔잔한 재즈를 재생시키고, 아침은 간단한 과일이나 셰이크 혹은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먹은 후 맥북으로 일을 시작하는 삶 말이다. 


이는 막상 실천해 보려면 절대로 쉽지 않은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런데 왜 이상하게도 온라인에는 이런 모습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삶'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날까. 그리고 나는 왜 나의 삶에도 이토록 깔끔하고, 정돈되고, 보기 좋은 모습을 들여놓길 원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삶과 멀다는 이유로 내 삶을 초라하게만 여겼을까. 


잘 생각해 보면 죽음을 앞두었을 때는 아무리 초라해보이는 삶이더라도 삶은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될 텐데. 그리고 죽음 앞에서 떠올릴만한 생각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보다는 내가 '무엇을 남겼는지'에 치중될 것 같은데 말이다.


이반 일리치 또한 죽음을 앞두고 생활 반경은 극도로 좁아지고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온 집안을 누비며 인테리어에 참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침대도 아닌 좁은 소파에서 고통 속에 잠긴다. 유일하게 아픔이 가실 때는 죽음을 앞둔 주인에게 '곧 나아질 것이다'라는 거짓 위안 대신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라는 말로 죽음을 똑바로 인지하고 주인에게 가여운 마음을 품는 하인의 시중을 받을 때뿐이다.




그래, 날 속일 필요가 있을까? 내가 죽어가는 것이 나 빼고 모두에게 분명한걸. 문제는 몇 주, 며칠이 남았느냐는 거잖아.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한때는 빛이 있었지만, 지금은 온통 어둠뿐이구나. 한때 나는 여기 있었는데 지금은 그리로 가겠지! 어디로 가는 걸까?

 


매번 그랬다. 한 방울의 희망이 반짝이고 나면, 그다음 절망의 바다가 분노하고, 변함없이 통증, 변함없이 통증, 변함없이 우울함, 그런 후 모든 것이 똑같다. 혼자는 끔찍이 쓸쓸해서 누구든 부르고 싶었으나, 누군가가 있으면 상태가 더 나빠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음은 우아하지도 않고, 품위스럽지도 않으며 오히려 고통스럽고 추하고 비참하다. 죽어가는 이를 간병하는 주변 사람 또한 우아함과 고상함과 거리가 멀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에게는 자신을 돌보는 주변 사람의 힘듦을 돌볼 여력이 없다. 오히려 '건강해 보인다'라는 이유로 그들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올바른 삶을 살았던 자신에게 왜 통증은 가시지 않는지, 왜 오히려 죽음과 가까워지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하지만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그동안 '옳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삶이 진정으로 옳은 삶이었는지 자문한다.




“그래, 모든 게 옳지 않았어.”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상관없어. 할 수 있어. 옳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옳다는 게 뭐지?” 그는 자신에게 묻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았을 때, 과연 어떤 삶이 옳다고 느껴질까? 작년에 들은 한 북토크에서 젊은 나이에 암 선고를 받은 강연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다 보니,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도록 창작물을 계속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처럼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생각하던 이반 일리치도 죽음 바로 직전에 주변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남들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만을 추구했던 삶,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가족 사이의 갈등은 회피했던 자신의 삶은 완전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도 아직 삶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족에게 연민을 표함으로써 그는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들이 가엾다'


'그들이 아파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들을 구출하고 스스로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동안 좋은 삶을 살았는데 이렇게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억울함,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한한 연민을 주기를 바랐던 바람은 주변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변화한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간신히 전달함으로써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더 이상 없고', '죽음 대신에 빛이 있었다'라는 걸 알게 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무력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일부러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해야만 마땅히 나아갈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만을 염두에 두면서.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어떤 삶을 마땅히 살 것인지 생각하기 전, 죽음 뒤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생각하라고 일러준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고 죽어야만 하지만, 그래도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고, 그들을 염려함으로써 죽은 뒤에도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






어차피 모두 죽을 것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이러한 질문은 감수성 예민하고 철없는 어린 시절에만 할 법한 질문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막막한 어른도 마땅히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라고, 톨스토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삶은 온전히 '나'라는 존재로만 구성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니 말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나만 억울하고, 힘들고, 외롭고,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한다 '나' 중심의 세계를 넘어 '내가 죽은 후 남겨진 이들의 세계'로 생각을 확장시킨다.


죽음을 직전에 앞둔 순간에도 나의 고통은 여전할 것이다. 나의 눈앞도 어두울 것이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사람의 삶은 그대로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남길 수 있다.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해할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이처럼 주변 사람을 향한 배려와 연민을 통해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남길 수 있다.


어떤 삶이 '잘 산 삶'일까. 책을 읽는 내내 이 생각을 했다. 조회 수 500만을 달성한 유튜브 브이로그 영상에 나올 것 같은 삶, 돈 걱정할 필요 없는 삶, 원하는 권력을 얻은 삶 모두 잘 산 삶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잘 산 삶의 기준은 달라진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살면서 무엇을 차지할 수 있는지'가 아닌 '죽은 뒤에도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또한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나라는 고유한 삶만이 전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편이 낫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오래된 문장이 아직까지도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무언가를 가질 수는 없지만 남길 수는 있다는 불멸의 진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우리'와 함께하는 삶으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남겨야 할까?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점]


- 내가 가진 것 중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내어주기



[답을 찾고 싶은 질문]


- 세상에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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