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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가 막 시작된 12시 21분의 사이렌 소리

죽음에 관한 자전적 에세이

by 현의


photo-1630264889216-398bc900510a.jpg?type=w966 © parlonscoree, 출처 Unsplash


새로운 사랑이 탄생하는 밸런타인데이가 이제 막 시작된 밤 12시 21분. 사이렌 소리가 평온한 동네를 찢어발겼다.


사실 이제는 정적을 깨는 도시의 소음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내 방 창문 너머에는 도시에서 들을 수 있는 대부분의 소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근처 병원을 오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뿐만이 아니라, 아무래도 엔진이 맛이 간 게 분명해 보이는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 근처의 먹자골목에서 한바탕 시간을 보내고 온 듯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동이 틀 때면 슬슬 들려오기 시작하는 버스 엔진 소리 등 한밤중의 고요함을 깨는 소리는 오랫동안 내 삶의 일부였으니까.


만약 내가 아무 걱정 없이 밤 10시에 규칙적으로 잠을 자는 사람이었다면 12시 21분의 사이렌 소리는 단지 소음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혹은 아주 늦은 밤에 타인의 부축을 받아 응급실에 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어도 사이렌 소리는 단지 남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던 나는 그날의 사이렌 소리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날이 밸런타인 데이라는 기념일이라는 사실도, 밤 12시 21분이라는 시간도 신경 쓰였다.


어쩌면 그 시간의 내가 사이렌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위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는 구급차처럼 앞으로의 생존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의 나는 미래에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을 잘 수 없었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잠을 자는 대신 선택한 어느 영상에서는 청년들이 맞이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앞으로는 평생직장도 없어질 것이고, 학력이 꼬리표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정규직의 가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논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래를 상상하던 도중, 사이렌 소리가 모든 생각을 산산조각 냈다.


'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만 걱정하고 죽음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안 하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생각이 깨진 자리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생명이 위태로운 위급 상황을 알리는 소리는 창문 너머에 항상 존재했다는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간호사, 의사, 환자, 환자의 보호자는 항상 존재했다. 아무런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나의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옆에서 말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오늘의 할 일 목록을 적고, 수시로 캘린더로 일정을 확인하고, 자기 전에는 내일의 할 일에 집중하는 하루를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의 존재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오늘 존재하는 것'만을 내 삶의 전부처럼 여기고, 오늘을 잘 보내기 위한 선택에만 집중해왔다. 오늘은 왠지 운동할 기분이 아니라고? 그럼 늘어지게 쉰다. 어제는 라면을 먹었는데 오늘은 피자가 먹고 싶다고? 그럼 좋아하는 피자를 먹는다.


하지만 초콜릿을 주고받으며 영원히 함께할 사랑을 꿈꾸는 밸런타인데이가 시작되자마자 삶과 죽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이렌 소리가 태어날 수도 있는 것처럼, 미래와 죽음은 동시에 다가온다. 그런데도 내 삶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미래의 삶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까?


사이렌 소리가 거리를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무거운 적막과 질문이 내려앉았다. 사실 나는 순진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사느냐가 곧 어떻게 죽느냐를 걱정하잖아. 조금 즐겁게 살아도 괜찮을 거야. 하지만 결국에는 현실이 순진함을 걷어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즐겼던 어떤 게으른 즐거움은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는 후회로만 남을 거란 걸 마주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삶을 위해, 혹은 죽음을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어떤 선택은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죽음과의 거리도 좁혀주는데 말이다. 대체 삶의 즐거움은 어디까지 누려야 하고, 죽음에 대한 걱정은 얼마큼 해야 할까?


현재를 사는 것과 미래에 죽는 것은 12시 21분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서로 어긋남 없이 포개어진다. 그러므로 나 또한 어느 한쪽에만 치중되지 않은 균형 잡힌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걱정하느라 삶의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도, 삶을 즐기느라 죽음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저 오늘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잘 챙기되, 그중 건강을 위한 습관을 단 하나라도 하면서 죽음에 대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것 또한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

늦은 밤에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구급차가 달리는 이유는 삶과 죽음이 아무리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걱정하느라 인생의 즐거움을 전부 놓아야 할 이유도, 죽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의 즐거움만을 추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삶에서 내린 어떤 선택은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재평가될지를 고려해 보며 균형 잡힌 삶, 균형 잡힌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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