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하는 것

26년 2월 1주 차 기록

by 현의

이번 주에 우연히 보고, 듣고, 만든 것들을 기록합니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나만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는 능동적인 창작자로서 살아보기 위한 작은 여정이 담겨있습니다.


26년 2월 1주 차 보고, 듣고, 만든 것 요약


1) 본 것: 유명한 고전 소설


이번 주에는 독서모임 선정 도서인 <싯다르타>를 읽었습니다. 초반부에는 별로 공감이 가지도 않고 몰입도 잘 안되었는데 절반을 넘어서니 완전히 내용에 몰입했어요. 무엇이든 다 통달하고 그저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실수도 하고, 욕망에도 사로잡히고, 무엇이 진실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바람에 갈등이 심화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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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모든 방황도 사실 올바른 길이었고, 어떤 모습으로 그 길이 나있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인상이 이 정도로 완전히 뒤바뀐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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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를 존중하는 까닭은 그 돌멩이가 미래에 무엇이 될 거라는 잠재적인 가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오래전부터 이미 돌멩이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에는 아직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거였다면? 그동안 무언가가 부족하고, 기회가 없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2) 만든 것


'매일 블렌더로 무엇이든 만들기' 도전은 이번 주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기 위해 이번 주의 목표는 저번 주보다 훨씬 낮추었어요. 거창한 모델링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블렌더를 켜서 점 하나라도 옮기는 걸 목표로 삼겠다는,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최소한의 목표를 설정했는데요. 심적인 부담이 훨씬 덜해서 그런지 이번 주의 블렌더 여정은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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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일요일]


너무 늦은 시간에 블렌더를 켰지만 그래도 완전히 망쳐도 좋으니 일단 무엇이든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얼렁뚱땅 만든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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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주 간단하게 만든 냄비. 냄비 속 이미지는 AI에게 출력을 부탁해서 만들었는데, 저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정체불명의 스튜 이미지가 계속 나와서 실망했습니다. 앞으로는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이미지라면 굳이 AI에게 이미지 제작을 맡기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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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쿠키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튜토리얼을 시청한 뒤, 배운 내용을 응용해 보려고 약과를 만들어보았습니다. 다만 상단은 그럴듯해 보이긴 하는데 옆면은 전혀 약과처럼 보이지 않길래 그냥 약과 샌드를 만들어서 어색함을 무마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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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아이스크림 만들기 튜토리얼을 보며 만든 결과물. Displacement 모디파이어를 활용해 울퉁불퉁한 아이스크림 겉면을 만드는 작업이 재밌었습니다. Noise texture를 사용해서 쿠앤크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만드는 내내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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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삼각김밥. 쌀을 만드는 법이 궁금해져서 튜토리얼을 찾아보다가 만들게 되었습니다. 김의 텍스처가 좀 어색해 보이는데 이를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밥알의 텍스처를 좀 더 자연스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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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약과에 이어 한국적인 것을 모델링 하고 싶어서 어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김밥 만들기에 도전했습니다. 밥알의 개수를 지나치게 높게 조정한 모양인지 김밥 한 줄을 옆으로 복사하고 나니 노트북이 매우 느려지면서 아주 사소한 지시마저도 최대한 지연하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김밥을 올려놓을 접시도 모델링 하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느려져서 그냥 풀밭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김밥의 내용물도 좀 더 사실적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대충 흉내만 낼 수밖에 없었던 점은 아쉬웠어요. 그래도 색상으로 각 재료 구분을 확실히 해보려 노력했습니다. 햄, 게맛살, 계란, 오이, 우엉, 단무지가 들어있는 게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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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다음 주가 설날이기 때문에 만들어본 송편. 다 만들고 보니 송편은 설날이 아니라 추석에 먹는 음식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한국적인 것을 만드는 시도는 계속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만족스럽습니다.


지난주에 케이크 모델링 튜토리얼을 보면서 생크림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이를 응용해서 송편의 모양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생각했던 그대로의 결과물이 나와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번 주에는 유튜브가 첫 화면에 띄워주는 영상들을 훑어보다가 블렌더 초보자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담긴 짧은 영상도 시청했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오메트리를 익히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간단한 튜토리얼 영상을 여러 번 따라 해보며 모델링 하는 법부터 숙달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같은 튜토리얼을 여러 번 시청하는 건 아무 문제 없다는 말도 큰 용기를 전해주었어요.


이 모든 배움의 과정이 심각할 정도로 느린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적도 있었는데 이러한 조급함도 덕분에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그러니 다음 주에도 소소하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는 작은 모델링을 계속해 보려 해요.



3) 들은 것


이번 주에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주목받은 몇몇 아티스트들의 노래를 찾아 들었습니다. 이번 그래미 어워드의 앨범상은 배드 버니가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그의 곡을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호기심에 스포티파이에서 그의 인기곡 중 하나를 들어보았어요. 그리고 몇 초 지나기도 전에 그 곡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평소에 자주 찾아 듣지 않는 장르의 노래, 한국에서는 거의 들어볼 일이 없는 낯선 언어로 부른 노래에 단숨에 매료될 거라고는 저조차도 몰랐어요.


https://youtu.be/a1Femq4NPxs?si=iNfsCKgAY5Zs2YXg



유튜브에서 다시 그 노래를 찾아보니 조회 수가 벌써 3억 회를 넘었더라고요. 그런데도 이 곡을 지금껏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세상은 정말 작았으며, 이 넓은 세상에서 그동안 제가 보고 듣고 이해했던 것은 실제 세상의 절반에도 못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겸손해지더라고요.


배드 버니가 그래미를 수상한 이후에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명하는 기사도 몇 개 찾아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배드 버니는 영어 대신 스페인어로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뿌리를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고, 사회 이슈에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아티스트임을 알게 되었는데요. 세상이 자신을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고 규격화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과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영어로 미국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푸에르토리코의 억양과 라틴의 리듬,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날것 그대로 무대에 올린다. 이번 수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그는 푸에르토리코의 전통 거리 축제를 재현하겠다고 예고했다. "내가 수퍼볼 무대에 서는 것은 단순히 유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무시당할 수 없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마트 봉지 담던 손으로 수퍼볼을 쥐다…미국 주류 사회를 얼어붙게 만든 '화난 토끼'[미국읽기]



세상은 정말 넓은데 나는 그 세상을 티끌만큼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세상에 티끌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이런 막막한 생각에 살짝 잠식당할뻔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그 점이 저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자격이나 영향력이 없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은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이를 표현하려 노력하는 것이 앞으로 창작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세상이 나를 어떻게 정의할지는 절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를 만든 나의 고유함, 나의 뿌리, 나의 근본,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답을 스스로 정의하는 건 가능할 것입니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현재의 나는 이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탐구해 보는 건 상당히 재밌는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아요. 모방과 복제가 너무 쉬워진 세상에서 절대 복제되지 않을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귀한 자질을 키울 기회이기도 할 테고요.


그래서 이번 주에 블렌더로 김밥을 만든 뒤에는 그에 대한 구구절절한 개인적인 이야기도 함께 적었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나 자신에게 김밥이라는 음식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었어요. 한국 사람이 대체로 좋아하는 라면과 떡볶이와 궁합이 잘 맞는 단짝, 소풍을 갈 때나 바쁜 시간대에 함께하는 간단한 식사, 인플레이션을 실감하게 해주는 척도, 재료를 준비하는데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집에서 만들면 이상하게도 끝없이 먹게 되는 음식, 집집마다 포함되는 재료가 각양각색인 음식,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쭉 함께하는 동료. 이러한 다채로운 특징 중 개인적으로 제게 의미가 있는 사항 몇 가지를 골랐습니다.


블렌더를 통해 이루고 싶은 야심찬 목표가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아주 작은 실력으로도 지금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의 뿌리를 표현하는 것일 겁니다. 어릴 때 함께한 음식, 어릴 때 들은 음악, 현재의 고민, 현재의 관심사, 미래의 야심, 절대 이뤄질 리 없는 허황된 꿈을 간단하게라도 표현한 뒤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한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이제는 점차 이해가 갑니다. 매운 것을 못 먹고, 김치를 자주 먹지도 않고, 치킨도 별로 안 좋아하고, 라면은 정말로 싫어하고, 한국 아이돌을 좋아해 보려 노력했던 시도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항상 실패로 돌아갔고, 오랫동안 견고하게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암묵적인 문화나 규칙에 항상 반감을 가졌지만 그래도 무엇이 한국적이고, 무엇이 한국인인지를 정의하는 건 오직 이런 것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의 국가가 성별, 나이, 출신, 이력, 재산, 인맥 등등 시시콜콜한 잣대로 나와 같은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언제든 주류 사회에서 밀어낼 준비를 하고 있더라도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나와 완벽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런 혼란 또한 마찬가지로 나를 구성하는 일부임을 인정하고 이를 표현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삐뚤빼뚤한 모양새로 나있는 길 또한 기꺼이 걸어가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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