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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Jan 13. 2020

“그 사람 냄새가 선을 넘어”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에게 냄새란 이런 것이었다. 향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상징을 지닌 것. 향은 언제든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냄새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내 공간엔 내가 허락한 향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요리를 할 때 나는 냄새와 세탁을 마친 빨랫감을 널어놓을 때 나는 냄새, 보관을 잘못한 옷에서 나는 냄새들은 자연현상처럼 너무 위화감 없이 일상에 스며들곤 한다. 그리고 이 냄새들은 썩 좋지도 않아 맡다 보면 기분도 나빠진다.



  어느 날 문득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내가 손쉽게 조종할 수 있는 것은 향기뿐이라는 생각이 든 이후로 나는 향수를 열정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디퓨저, 캔들, 룸 스프레이, 바디로션, 바디 미스트, 탈취제 또한 여러 종류로 손에 넣었다. 지속력이 좋지 않아 남들에게 향이 전해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가 직접 나에게서 날 향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오히려 무엇이든 쉽게 질리곤 하는 성격상 향이 오랫동안 주변에 맴돌지 않는 편이 좋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도 아버지 기택이었다. 그의 다른 가족들에 비해 유난히 냄새로 인한 비난을 간접적으로 계속 받은 그 인물 말이다. 나는 그가 모두가 짐작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환시킨 이유도 결국엔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향기와 비슷할 수는 있지만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 바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것, 마치 우리의 본질과도 같은 바로 그 냄새 때문에. 냄새와는 거리가 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나는 영화 속 인물 중 그에게 가장 이입이 잘 되었고, 그의 선택 또한 마음에 와 닿았다.



영화 ‘기생충’ 의 기택



   본인의 냄새를 스스로 느끼기란 힘들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남들처럼 평범할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냄새를 또렷이 맡는 건 좀 어렵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타인의 냄새를 잘 느낀다. 어쩜 사람들은 본인과 다른 것이라면 기가 막히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다. 영화 속에서도 부잣집 가족들은 기택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단번에 알아챈다. 심지어 그는 이런 말까지 본의 아니게 듣는다. 그의 냄새가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 나는 냄새’ 같다는 말을.


  부잣집 가족의 의도치 않은 멸시를 차라리 혼자만 들었으면 좋았으려 만 그 순간 그의 옆에는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아무 말 못 하고 쥐 죽은 듯 있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의 옷깃에 코를 가져다대기만 한다. 왠지 그때의 그는 자신이 낳은 뿌리에게도 그런 멸시의 대상이 되는 냄새를 물려준 건 아닌지 생각했을 것 같다. 자신의 피가 섞인 존재들에게도 마치 태생적인 것처럼 몸에 밴 반지하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며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물론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업에 연달아 실패해 반지하에 사는 자신의 가족과 구김살 없이 친절하고 순수하기까지 한 부잣집 가족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걸 계속 의식하며 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청년 실업이 이렇게 높은 세상에 네 식구 모두가 취업을 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면서 사람 좋게 말하던 그는 그래도 이만하면 자신의 삶이 살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네 식구 중 가장 낙관적이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것이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부잣집 가족들은 그들에겐 ‘냄새’가 난다고 했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자신들과 거리가 아주 먼 ‘지하철’을 예시로 들면서 그들과 거리감을 두었다. 물론 가족을 정말로 멸시하고 싶었다면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부잣집 부부는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스쳐 지나가듯 그 말을 했다. 그런 무심한 말에 기택은 그토록 무시하고 싶었던 태생적인 한계를 직접적으로 마주친다. 그 이후로 그는 냄새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부잣집 부부의 행동을 보며 점점 얼굴을 굳히기 시작한다.



  평생 동안 피해 다니고 싶었던 진실은 이처럼 타인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듯이 하는 말에서 손쉽게 드러나곤 한다. 진실의 당사자는 타인이 이전부터 자신에게 예민한 부분을 차곡차곡 건드렸기 때문에 결국엔 폭발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해왔던 말과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상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말의 결과가 왜 이렇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그래도 참고 사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사람에겐 울컥하는 게 맞은 걸까?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고는 하지만 반지하에 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선택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부잣집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이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유일한 기회처럼 느껴졌고, 그렇기 때문에 상생이 아닌 독점을 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기생충일 뿐 숙주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분노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출할 수 있는  원초적인 감정인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그가 부잣집 가족들에게 ‘나도 너랑 같은 “사람”이다’라는 걸 알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가 그전부터 계속 시도했던 소통은 부잣집 사람들에게는 그저 ‘선을 넣을락 말락 하는 것’ 일뿐이었으니 분노만이 그의 유일한 의사 분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 대한 반감은 영화에 나온 것처럼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이 더 이상 몸에 담아둘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쌓일 때 밖으로 표출된다. 계층 간의 거리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떠오른 것은 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다른 누군가를 보고 열등감을 표출했던 순간이었다. 아무리 봐도 내 입장에서는 부유한 축에 속했던 그 사람들은 항상 자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들먹이며 그 사람들이 바로 진짜 금수저라고 말한다. 그런 금수저들은 자신에게 없는 또 다른 요소를 가진 사람을 들먹이며 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침을 튀겼다. 결국 계층 간의 거리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누가 봐도 영화 기생충은 자신의 속내를 뒤집는 것 같은 찜찜한 영화가 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누구나 이렇게 다른 이를 욕망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을 보고 피해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바꿀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뒤 그걸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바꾸는 방법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내 입장에서 본 내 현실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고 그래서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너무 낙관적인 생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계획이 실패 확률이 가장 적은 성공적인 계획이라는 무책임한 말보다는 차라리 주어진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가장 나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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