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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Jan 13. 2020

당신의 마음속에도 가라앉은 소금이 있나요

위자드 베이커리를 읽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그 안에서.



  음료를 주문할 때마다 갓 구운 쿠키를 덤으로 주는 카페가 있었다. 주문을 끝낸 후 어디에 앉을까 두리번거리다 결국에는 늘 앉는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달달한 쿠키 굽는 냄새가 행복하게 다가오곤 했다. 비록 입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도 이미 달큼한 냄새 만으로 한 입의 쿠키를 베어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문한 음료와 함께 쿠키가 나오면 첫 입에는 바삭하면서도 까끌한 쿠키의 표면을 느끼다가, 절반쯤 먹을 때쯤이면 드러나는 부드러운 속에 푹 빠져서 끊임없이 쿠키 한 입과 음료 한 모금을 반복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하는 디저트에 푹 빠진 이후로는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제목을 볼 때마다 그 카페의 쿠키 굽는 냄새가 떠오른다. 책의 내용도 쿠키만큼 달달하냐면, 전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고등학생인 주인공은 매일 집 근처의 빵집에서 저녁 대용으로 먹을 빵을 산다. 빵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새엄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친엄마에게 버려진 기억이 있는 그는 새엄마에게 친엄마 역할을 해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저 겉으로 보았을 때 보편적으로 모난데 없어 보이는 가족처럼 보이는 ‘역할놀이’에만 충실히 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아빠가 무심결에 툭툭 주인공에게 내뱉는 말들(“네 엄마는 예전에 공부 잘했어”)은 새엄마의 콤플렉스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였고 급기야 그녀는 집 안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점점 좁혀가는 것으로 주인공의 친어머니의 존재감을 지우기 시작한다. 그의 친모와 관련된 어떤 사소한 점이라도 꼬투리를 잡고 그를 괴롭히는 새엄마 때문에 주인공은 집에 오면 곧장 현관문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는 나오지 않는 일상을 계속하게 된다. 더듬거리는 말투 때문에 학교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매일 늦게 집에 오는 아빠는 그런 사실을 알리가 없다. 그는 완벽히 혼자서 자신의 삶을 꾸리고 있었다.



  가만히 숨죽여 살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빨래를 하려던 중 옷더미 속에서 새엄마의 어린 딸 무희의 속옷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속옷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무희는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말이다. 누가 그랬냐고 다그치는 새엄마의 말에 처음에는 학원 강사를 지목했던 무희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바꾸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주인공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만다. 엉뚱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그는 그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더듬거리는 말투 탓에 빠른 시간 안에 조리 있게 진실을 밝힐 자신도 없었다. 새엄마가 경찰에게 신고 전화를 하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돈도 친구도 없는 주인공은 도망칠 곳마저도 없었지만 마침 밤늦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던 집 근처 단골 빵집에 일단 들어갔다. 자신을 숨겨달라는 주인공의 말에 점장은 아무 말 없이 오븐을 열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오븐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오븐 안에는 침대와 책장, 벽난로, 심지어 파랑새까지 있는 또 다른 방이 존재했다. 주인공이 빵을 고를 때 옆에서 그 빵은 라푼젤의 비듬으로 만든 거라느니 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곤 했던 괴짜 점장이 알고 보니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소년, 선택할 용기를 얻다




  작가는 이 책의 말미에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을 남긴다. 해리 포터처럼 낯선 세계에서 모험을 떠나는 판타지 이야기인 줄 알았건만, 주인공이 마법사와 함께 빵집에 일하면서 겪는 일은 모험이 아닌 선택의 연속이었다. 선택은 언제나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기 때문에, 늘 앞에서 행한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운명을 가졌다.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했는데도 삶이 뒤틀렸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마법사와 함께 자신의 행동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해리 포터의 모험이 절대악과의 싸움인 반면에 위저드 베이커리의 모험은 주인공이 삶을 직시하는 싸움이다. 그래서 전자는 독자들에게 악당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쾌감을 주지만 후자는 주인공의 과거와 상처를 더듬어 보면서 눈물짓게 한다. 둘 다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 작품인데도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조금씩 삶에서 선택권을 잃어가는 과정을 되짚어 보게 된다. 무언가를 선택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 때부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비록 수중에는 오래되어 비닐봉지가 빵빵하게 부푼 보름달 빵밖에 없어도 말이다. 주인공이 새엄마의 모진 행동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이유도 어릴 때부터 겪은 무력함 때문일 것이다. 절대로 바뀔 리 없을 것 같은 무력한 순간들이 결국 주인공이 청소년으로 자랄 때까지도 소금물처럼 그의 안에 진하게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마법사와 함께 지내는 동안 주인공은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또 그 행동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배움으로써 어릴 때부터 가라앉아있던 무기력이란 앙금을 떨쳐내기 시작한다. 물론 소금이 물에 녹았다 할지라도 소금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떨쳐내고 잊은 줄로만 알았던 옛날의 아픔이 언제 곤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는 있다. 오래전에 방치한 소금물을 무심코 보통의 물과 착각해 마실 수도 있는 것처럼, 잊은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의 고통은 무심결에 다시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래 전의 아픔을 물에 적셔 눈에 띄지 않게 녹여버리는 선택을 한 사람은 다시 그 아픔과 마주했을 때도 또다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예/아니오 둘 중 하나뿐인 선택을 통해 결국 성장한 것처럼 삶에서 마주하는 아픔을 직시할 때마다 이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선택하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해리 포터도 우리에게 선택에 대해 일러주었다. “슬리데린은 안 돼”라는 생각을 한 덕분에 그는 슬리데린에 들어가도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컸음에도 그리핀도르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덤블도어는 그것이 바로 해리 포터가 마법사 세계 최악의 악당 볼드모트와의 차이점이라고 했다. 덤블도어는 말한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드러난단다.” 어릴 때는 그냥 소설 속의 한 문장이었을 뿐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이만한 인생 조언이 또 없다.







새해를 맞아 지난해를 다시 되짚어보았다. 작년은 유난히 후회가 짙은 날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고난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일만 기억에 남는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주인공처럼 그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되길 바라며 문제를 외면하고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있던 적도 있었다. 이미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친 일들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앞으로 이런 일에는 어떻게 대응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차분히 생각한다면 이전의 사건들은 물에 녹아 한동안은 떠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마법사가 달콤한 빵을 만들어 눈앞에 내밀었을 때 나에게 맞는 적절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예/아니오 둘 중 하나를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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