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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Jan 17. 2020

나는 000 하다고 말하는 이는 대개 000의 반대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를 읽고


그래도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그랬다, 사치스럽고 낭비겠지만,
그러지 않을 이유는 또 뭔가?
인생이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경계를 탐험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렸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주인공 엘리너는 이런 독백을 한다.

사람들이 내게 어떤 일을 하는지 물으면 나는 회사에 다닌다고 말한다. 어떤 회사인지, 혹은 거기서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본 사람은 거의   동안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들이 생각하는 회사원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해서 그런지, 아니면 회사에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그들의 머릿속 빈칸이 자동으로 채워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를 읽은 즉시 그녀에게 푹 빠졌다. 그녀가 나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직장 내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며 단조로운 업무를 하고, 점심시간에는 늘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신문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맞춘다. 금요일 저녁에는 술과 피자를 사 온 후 홀로 주말을 보낸다. 그녀는 이런 생활을 9년간 지속해왔다. 사람과 접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교 능력은 0에 가깝다. 입만 열면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적절하고 엉뚱한 말 뿐이다. 한 번도 배달 음식을 시켜먹은 적이 없으니 배달원에게는 모든 금액을 동전으로 지불하기도 하고 생에 첫 네일아트를 받은 후에는 ‘집에 가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라는 말을 남기고 가게를 나서기도 한다. 이러니 누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오기는 할까 싶다.



  늘 같은 일상이 되풀이될 것 만 같던 어느 날, 그녀는 직장 동료와 함께 간 콘서트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무대에 선 인디 밴드의 잘생긴 보컬을 보자마자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열렬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던 그녀는 곧이어 그러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 브라질리언 왁싱, 네일 아트, 바비 브라운 없는 바비 브라운에서 화장품 구매하기, 맨날 입는 조끼 말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옷’ 사기, 펍에서 놀기, 친구 집 방문하기, 파티 참석하기 등등. 그러나 그녀는 브라질리언 왁싱의 결과물을 보며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다’ 라며 불만을 표하기도 하고, 네일 아트는 집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상기하기도 하고, 높은 구두를 신어 보길 권하는 직원을 보며 ‘이 사람들은 여성 고객들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데 왜 이렇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성적인 거지?’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렇듯 가감 없는 그녀의 솔직한 생각은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새로 입사한 IT부서의 레이몬드의 등장 또한 그녀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다. 땅딸막한 키와 티셔츠를 볼록 튀어나오게 하는 동그란 배, 불그스름한 피부를 가진 레이몬드를 보자마자 엘리너가 떠오른 단어는 단 하나뿐이다. ‘돼지’

  며칠 후 우연히 퇴근길에 함께 길을 걷게 된 레이몬드와 엘리너는 횡단보도 건너편 길에서 쇼핑봉투를 들고 걸어가던 한 노인이 갑자기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냥 대낮에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며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엘리너를 빤히 바라보며 레이몬드는 “노인이에요 엘리너.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자마자 곧장 노인을 향해 달려간다.



  엉겁결에 레이몬드와 함께 노인을 구하게 되면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병문안을 가게 된다. 그리고 의식을 회복한 할아버지 ‘새미’와 친해진다. 병원을 나선 후 레이몬드는 엄마 집에 놀러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훗날 ‘그 남자’와 함께 하게 될 때 타인의 집에 갔던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레이몬드의 제안을 승낙한다. 집에서 그의 어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온 이후로 레이몬드는 점점 다양한 제안을 하기 시작한다. 함께 점심 먹지 않을래요? 새미의 가족들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래요? 바에 가서 한 잔 하지 않을래요? 등등. 엘리너는 그의 제안을 계속 수락하고 덕분에 별별 시행착오를 다 겪지만, 그 과정에서 레이먼드가 어떤 상황에서든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해서 함께 있으면 유용하며 참 친절한 남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순조롭게만 보였던 그녀의 변화에 항상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교도소에서 엘리너에게 전화를 하는 엄마다. 엄마는 늘 달콤한 목소리로 엘리너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진 말만 한다. 엘리너가 인생을 바꿀 남자를 찾았다는 소식에는 흥미를 보이면서도 엘리너를 향해 너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느니, 쓸모없는 존재라느니, 실패한 사람이라느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느니 등등 그녀의 새로운 도전을 우습게 보는 말만 늘어놓는다. 엘리너는 교도소에 있는 엄마의 나쁜 본성이 자신에게도 내재된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워하면서도 늘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엉뚱하게 흘러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침울하고 안타까운 것은 바로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아무리 간절해도 쉽게 이뤄지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친절한 레이먼드와 함께 있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할퀴는 엄마가 계속 옆에 존재한다면, 변화는 그녀에게 터무니없는 공상 혹은 실패로 이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몸부림으로만 치부된다. 그리고 이는 엘리너처럼 특수한 사람이 아닌 보편적인 사람에게도 언제든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내 안에 눌러앉은 그 외롭고
초라한 괴물을 끄집어내어
햇볕을 쬐어주어 외롭지 않고
초라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하는 내 삶의 법칙이 있는데, 첫 만남 때부터 본인을 000한 사람이라고 한참을 설명하는 사람은 대개 000 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세히 알고 보면 그가 주장하는 000이란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고기를 한참 동안 잘라낸 후 주변 사람들에겐 완벽한 살코기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성이 잔뜩 들어간 허례허식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언제까지 볼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말에 굳이 일일이 참견할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말이 실제로 어떤지는 알고 있어도 사사건건 따지고 들지 않아 그는 자신만의 허세에 한참을 빠져있는다.


  나는 이것이 허세 부리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잘 생각해보니 나 또한 나의 말에 속아 한참을 나에 대해 잘못 정의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마치 엘리너 올리펀트가 본인은 ‘완전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실제 상황과는 정반대의 말만 자신에게 주입시킨 나날이 길었다.


  내가 나에게 주입시킨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혼자서도 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개입은 필요하지 않다, 혼자서도 충분히 완벽하다.


  재밌게도 내가 그런 말들이 100%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을 때 알아챌 수 있었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외로움을 느낀 것이다. 정말 괜찮고, 정말 외롭지 않다면 사실 그런 말들은 스스로에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로 진실된 것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 없이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면 그런 말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고, 그 진실을 바탕으로 진짜로 현실 속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도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인 척 자신에게 말했다.


  이러니 내가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라는 제목과 더불어 첫 페이지의 한 두 문장만 보고 엘리너에게 큰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괜찮지 않고 견고한 일상을 부숴줄 계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 것, 그리고 그를 위해 변해야겠다는 다짐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숨기고 있었던 변화에 대한 그녀의 갈망에 불을 붙일 계기 정도로만 치부하는 게 옳다.








  책 줄거리와 초반의 몇 장만 읽어보면 이 책은 그저 흔한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로만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장을 조금만 더 넘겨 그녀가 레이몬드의 도움으로 용기를 내어 이전까지 그녀의 삶에 조금도 들여놓지 않았던 새로운 도전을 해나가는 걸 보기 시작한다면, 이 책은 친구의 도움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는 성장 소설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외로움에 지쳐 무너진 자존감을 감싸 안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소설이다. 고민이 있어도 마음 놓고 터놓을 사람은 현저히 부족하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은 외로운 자신을 인정하고 그 이후로 차근차근 다시 걸음을 옮기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주위에도 언제나 엘리너의 곁을 지켜주는 레이몬드 같은 존재가 있음을 떠올린다면, 2020을 맞아 새롭게 변하고 싶은 열망이 조금 더 밝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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