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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Jan 28. 2020

생략했다, 그래서 발견했다

영화 ‘라라 랜드’를 보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비틀즈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러버소울 앨범의 수록곡 중 하나인 노르웨이 우드였다. 카페의 소음 속에서 간신히 그 익숙한 멜로디를 찾아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밴드의 팬으로 사는 게 참 대단한 일이다 싶었다. 아무리 낯선 장소에 가도 내가 늘 들어왔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 아닐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쫓아오는 불안과 초조함을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로 지우는 건 참 즐겁다.




  몇 년 전에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낯선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익숙한 것을 떠올린다고. 흔히 사람들이 난생처음 먹어보는 음식의 맛을 설명할 때면 예전에 먹었던 음식 중 그것과 가장 비슷한 맛을 냈던 것을 생각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익숙한 경험이 곧 낯선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발견한다면 그곳은 내게 즐거운 기억이 우선적으로 심어지는 장소가 될 것이다. 실제로 필리핀에 한 달 정도 머물렀을 때 외국인들로 꽉 차 있던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이곳 사람들도 나와 같은 노래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에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내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재생했던 노래를 낯선 카페와 낯선 나라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라라랜드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꿈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발견한다. 셉과 미아가 아닌,  Another day of sun을 노래하며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들 말이다. 나와는 별개의 존재처럼 보였던 자동차 속 각각의 개인이 밖으로 나와 한 목소리로 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서로가 서로와 같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다가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와 경적 소리를 끝으로 마무리를 하려다가 It's another day of sun.이라고 툭 내뱉으며 재차 이들 모두가 꿈을 가진 존재임을 알린다. 그리고 그 뒤로 셉과 미아의 모습이 차례로 나오며 스토리가 진행된다.







  Another day of sun이 나온 뒤에는 Someone in the crowd가 등장한다. 미아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줄 존재를 끊임없이 찾는다.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배우로 데뷔시킬 극적인 기회도 아닌 자신을 '찾아줄' 사람 말이다. 그리고 미아는 우연히 방문한 레스토랑에서 셉을 발견하게 되면서 두 번째 만남을 갖는다. 이어서 파티에서의 세 번째 만남도, 미아가 알바하는 카페에서의 네 번째 만남도,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재즈 바 셉트에서의 만남도 서로는 서로를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서로를 발견하는 장면이 계속 반복되다가 결국 셉과 미아는 하나가 된다.




  그런데 라라랜드가 사랑에 빠진 연인을 그리는 모습은 상투적인 로맨스 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라라랜드는 우리가 흔히 본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처럼 언제 서로가 서로에게 빠졌는지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하나하나 일러주듯 설명하지 않는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밴드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미아를 셉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상투적인 장면 말고 미아를 바래다준 후 파티장 입구 바로 앞에 주차된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가는 셉을 보여준다. 미아가 친구들에게 셉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설명하는 장면 대신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창밖으로 얼핏 극장을 보고서는 셉과의 약속을 떠올리듯 미소 짓는 미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서로 사랑에 빠졌음을 '발견'한다.




  이처럼 영화 라라랜드는 셉과 미아가 서로에게 빠졌음을 대사 없이 행동만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서로가 헤어졌음을 관객들에게 알릴 때도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사소한 잡담이 말싸움으로 번지는 장면을 보여주고, 셉과 미아가 처음 만났던 장소를 보고 이곳이 예전과는 달리 낮에 볼 때는 볼품없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걸 통해 관객들이 그들의 사이가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미아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미아와 그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영화상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미아가 어떻게 해서 남편을 만나고 아이까지 얻었는지 영화에서는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스타가 되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은 것도 물론이다.







  이와 같이 라라랜드는 보여주기식 연출과 더불어 나처럼 눈치 없는 관객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암시, 혹은 스토리의 생략을 통해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는 영화이다. 나는 어쩐지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함으로써 관객과 영화가 하나로 이어졌다는 걸 느껴졌다. 난생처음 먹는 음식의 맛을 이해하기 위해 이미 먹어본 음식의 맛을 떠올리는 것처럼, 관객들은 셉과 미아의 만남과 헤어짐 사이의 생략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이미 겪은 경험과 생각을 토대로 영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영화 후반부에 미아가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한 장면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틀어놓을 거면 왜 굳이 앞부분에서 셉과의 이야기를 주구장창 늘어놓았냐며 불평한다. 또 어떤 이는 셉과 미아가 결국 꿈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굳이 필요하지 않으니 그들이 헤어졌어도 개의치 않는다. 어떤 이는 미아가 남자친구와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셉과 썸을 타는 장면을 보고 연인 사이의 예의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이는 꿈꾸는 이들이 만나 서로가 꿈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한때 꿈꾸었던 것들을 떠올리느라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서로를 발견함으로써 서로가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것은 영화 속에서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다. 생략이 반복되는 이 영화를 이해하길 시도하면서 관객들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꿈을 찾는 미아와 셉을 모습을 따라잡으며 그들은 잃어버린 꿈에 대해, 꿈을 꾸는 것 자체가 꿈인 막막한 현실에 대해, 헤어진 연인에 대해 생각한다. 또는 지금은 잊고 있었던 꿈꾸는 자신의 모습과, 혹은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연인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나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꿈을 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일이고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꿈을 꾼 경험이 있으니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고. 미아와 셉이 거듭되는 만남을 통해 서로 자신만의 꿈이 있음을 발견하고 가까워진 것처럼 나는 라라랜드를 본 관객들 중 영화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발견한 사람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진부하고 뮤지컬 영화로서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고 느꼈던 이들도 미아와 셉을 통해 본인 또한 '꿈꾸는 자'였음을 발견한 사람들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라라랜드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와 더불어 발견이 사람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발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닌, 이미 존재하였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저 수많은 배우 지망생 중 하나에 불과한 미아는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은 다른 배우 지망생들 속에 섞여있었고, 셉은 저마다 다른 이와 이야기하느라 자신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손님들 속에서 누구나 칠 수 있는 캐롤을 연주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확신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따라가던 관객들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꿈을 이룬 셉과 미아는 헤어졌고 다시는 이전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지만 셉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미아를 보고 다 괜찮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들은 '꿈꾸는 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에게 이끌린 것이었고, 서로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꿈을 실현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미아도 괜찮다는 듯 미소 짓는다. 비록 헤어졌지만 서로가 서로의 꿈을 실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며 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꿈을 다시 한번 꾸어도 괜찮다고, 그리고 꿈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그 시간들도 괜찮다고. 미아와 셉을 통해 발견한 '꿈꾸었던'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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