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65. 바른 사람은 금지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데, 지저분한 방법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남들이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 본래 모습대로 행동해야 한다. 고상함과 비열함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정중함과 관대함, 신의가 사라졌다고 해도 당신 가슴속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과의 관계, 그 안에서 오가는 말과 행동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말 한마디를 하기 전, 행동을 옮기기 전, 잠깐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특히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는 서로에게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애쓴다. 나 역시 아픈 몸으로 지내다 보니 사소한 감정의 부딪힘조차 오래 남게 되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끼리 편안함을 잃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일이 요즘의 큰 과제다.
복학을 준비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이유 없이 예민했고, 아이의 작은 말투나 습관에도 마음이 요동쳤다. 서로의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몇 해 동안 객지에서 지내다 군 복무까지 마친 뒤 돌아온 아이를 내가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동행하겠다며 나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늦은 생활 패턴과 새벽에 움직여야 하는 나의 병원 일정은 늘 엇갈렸고, 그 틈 사이에서 서운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피어났다.
아픈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아이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한동안 깊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흔들리고 다시 다져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서서히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갔다. 서운함이 밀려올 때면 책을 펼쳐 읽었다. 책은 감정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주었다. 아이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집이라는 공간이 서로에게 편안한 쉼터가 되기를 바랐다.
나는 작은 목표도 선언했다. 아이가 다시 지방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까지 30권의 책을 읽겠다는 다짐이다. 다짐이 생기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아이 역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가까운 사람이니 내 마음을 다 알 거라는 착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삶과 속도를 가진 독립적인 존재일 뿐, 그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관계가 조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행동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 그 균형 때문에 아이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나 또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하루를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가족만큼은 내가 먼저 정중함과 관대함, 그리고 잃고 싶지 않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병이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바로 이런 마음들이다. 누구보다 가깝다고 해서 함부로 굴지 않고,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 그런 부모로 남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품위 또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