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69. 모든 성공을 합쳐도 작은 잘못 하나를 숨기지는 못한다.
백번 잘하기보다는 한 번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빛나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의가 잇는 사람은 남의 실수는 다 드러내도, 잘한 일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오후 1시에서 1시 30분 사이, 가정간호사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그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혹시 식사 도중에 갑자기 방문할까 싶어 점심도 미루고 기다렸다. 여름에 PICC 관리를 해 주던 간호사님이 다시 오시는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분이 배정되었다. 집을 찾지 못했나 싶어 먼저 전화를 걸었다. 당황한 목소리로 “10분 뒤에 도착하겠다, 약을 꺼내 달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에 “성함이…”라고 확인한다.
그 말투엔 꼭 필요한 말만 남긴, 지극히 사무적인 기운이 묻어 있었다. 이미 약속 시간은 20분 넘게 지나 있었다. 바쁜 일정 속에 모든 방문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림 속에서 작은 서운함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을 보다 보면, 자신의 삶보다 남의 삶에 더 관심이 많은 경우가 있다. 좋은 이야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점을 먼저 말하고,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내 기준으로 타인을 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요즘 읽는 책, 『몽테뉴의 말 에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당신의 존재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타인의 것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좌우하려 하는가.
당신과 나는 다르다.
나와 다른 당신을 나는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다.”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할 때, 타인을 내 틀에 끼워 맞추려 할 때, 실수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오만이 얼마나 깊게 박혀 있었는지 문장을 읽으며 돌아보게 된다.
말초신경염으로 아픈 발을 끌듯 천천히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물을 해 두었으니 가져다 먹으라고 한다. 그런데 본인도 관절주사를 맞아 걷기 힘들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고 싶지 않았다.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내 컨디션은 바닥이고, 누가 더 아프고 누가 배려해야 하는 상황인지 판단이 흐려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저녁에 몸이 좀 나아지면 들르겠다’고 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때로는 더 큰 짐이 된다.
나 또한 그런 입장이 된다면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을 때만, 그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맞게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결코 잘못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