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포기한 오후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79.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말의 절제는 능력을 보호한다.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는 가슴은 공개 된 편지와 같다. 비밀은 깊숙한 곳에 묻혀 있는데, 거기에는 중요한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넓고 숨겨진 공간이 있다. 꼭 해야 할 일은 따로 말한 필요가 없고, 말로 해야 할 일은 굳이 행동으로 할 필요가 없다.

집 근처 독서실에서 세 시간을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

오늘은 유난히 공부가 잘되었다.

정오가 되어 엄마 식사를 챙기기 위해 잠시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엄마 밥을 챙겨드리고 다시 독서실로 돌아와 오후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새언니와 둘째 언니가 와 있었다.

미리 연락만 해 주었더라면,

나는 굳이 이 시간에 집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는 손님처럼 맞이받았다.

팥죽, 미역국, 밑반찬까지 한가득 들고 온 두 사람.

“힘든데 뭐 하러 음식까지 가져왔어.”

따뜻한 말들이 오갔다.

오랜만에 보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인지

엄마는 내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차라리 내가 빠지고, 그들이 엄마와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 계획을 비껴간다.

꼭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아픈 데는 없냐, 몸은 괜찮냐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말들이 나를 둘러싼다.

오후 공부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이

서서히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내 일정대로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상황.

말을 하지 못하니 억울함만 쌓였다.

다음 주 항암이 벌써부터 두렵다.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은 날이 흔치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아쉬웠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생기면

내가 세운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다.

결국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마저도 나를 조금은 위로해 주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책으로도 출간된 작품으로 기억한다.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 속상한 날이다.

하지만 가족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려로 암 환자와 병든 엄마가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고.

나는 사전 예고 없이 누군가의 시간을 침범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

이제는 더 이상

상대방의 입장만을 먼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동네 지인이 만나자는 톡을 보내왔다.

다음 주 일요일, 집 근처로 온다고 했다.

그 시기는 항암으로 가장 힘들 때가 될 것 같아

이번에는 거절했다.

이번에는 교회에 같이 가자는 연락이 왔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아침 일찍도 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오래 앉아 있으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먼저 든다.

그래서 한동안은

설교 시간에 맞춰 늦게 가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른 시간에 함께 가자는 말이 돌아온다.

모든 것이 자기 기준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예전에는 그랬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 이해마저도 큰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20250817_164506.png


매거진의 이전글내 몸이 허락한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