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80. 양쪽을 분석해서 두 면을 모두 준비하라.
적이 해야 한다고 한 일은 절대 따르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해야 한다고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무엇이 좋은지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은 양쪽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양쪽을 분석해서 두 가지 면을 준비해야 한다.
어머니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지금 이대로 두면 더 나빠질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렇다고 강하게 밀어붙이면 관계가 먼저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그래서 나는 늘 양쪽을 생각한다. 설득해야 한다는 마음과, 설득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오래 서성인다.
어머니의 몸은 이미 한계에 와 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몇 걸음만 옮겨도 숨이 가쁘다. 중환자실에까지 갔던 경험이 있는데도, 비만 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의사들이 “이대로 가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질 수 있다”고 경고해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체중은 더 늘었고, 병원에 가야 할 과와 약의 종류만 늘어났다. 내일은 심장내과 첫 진료가 있고, 나는 어머니 몰래 가정의학과 진료를 하나 더 예약해 두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머니는 아마 진료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아직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지금의 고생보다 비만 치료를 시도해 보는 쪽이 훨씬 낫다고. 중환자실에서 고통을 겪는 것보다, 위험을 관리하면서 치료를 받는 것이 더 인간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어머니에게 닿지 않는다. 어머니는 매일 아프다고 말한다. 파스를 붙여야겠다고, 진통제를 더 먹어야겠다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운동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서기만 해도 좋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으로 향하는 길 앞에서는 멈춰 선다. 그 모순을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속이 상하다 못해 허탈해진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노인의 완강함은 고집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것을. 몸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자기 삶의 결정권이 사라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치료를 권유받는다는 건, 누군가의 관리 대상이 되었다는 신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어머니는 치료를 거부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자기 통제권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체념이다. 이미 아파봤고, 이미 고생해봤고,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았던 기억들. 그 기억들은 “해봤자 소용없다”는 결론으로 굳어져 있다. 새롭게 시도하는 일은 희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실패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노년의 몸은,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 포기에 더 익숙하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옳은 말만 반복하면,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흔들린다. 딸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는지, 혹시 방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동시에 깨닫는다. 어머니의 몸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 선택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열어 두는 일, 위험을 알려주는 일, 그리고 곁에 남아 있는 일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말수를 줄인다. 비만이라는 단어 대신 숨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좋겠다는 말을 꺼낸다. 치료를 해야 한다는 주장 대신, 엄마가 아프다고 말할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딸의 마음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넨다. 설득이 아니라 마음을 건드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본다. 그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 발 물러서기로 한다.
말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싸우는 방식을 내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과,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오늘도 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다. 이 답답함은 무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생긴 고통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