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86. 온전한 사람은 자기 결점을 잘 안다.
자기 결점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서 자기 결점을 알아야 한다. 온전한 사람은 결점이 비단 천으로 씌워져 있어도 알아챈다. 결점은 종종 금관을 걸치고 있는데, 그렇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다.
다리가 무겁게 느껴질 때면, 공원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집을 정리한다.
몸이 말을 듣지 않을수록,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세탁기를 돌리고, 눈에 띄는 지저분한 곳을 대충 닦아낸다.
정리되지 않은 집 안이 그대로 내 마음 같아서,
조금이라도 정돈해 두고 나가야 숨이 트인다.
며칠째 친정엄마의 앓는 소리는 하루 종일 이어진다.
24시간, 쉼 없이.
어디가 불편한지 묻고 또 묻는다.
무릎에 파스를, 허리에 파스를, 감기약을 챙기고
속옷을 갈아 두고, 콜라비를 씻어 두고
추울까 봐 조끼를 꺼내 놓고, 따뜻한 물을 데우고
변비약까지 빠뜨리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늘 정확히 알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해내는 내 몸과 마음이 점점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들이 3일간 여행을 간다고 한 뒤부터
엄마는 더 이상 ‘엄마’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되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음식을 받아 드신다.
모든 것이 맛이 없다고 한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 말이 가장 힘들다.
점심에는 거의 밥을 먹여 드리다시피 했다.
의외로 잘 받아 드신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가 너무 편안하게 모시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이제는 정말 도움 없이는 어려운 단계에 들어선 걸까.
이럴 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알 수 없다.
누군가를 원망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이 시간을 알지 못하고,
엄마 스스로도 변화해 가는 자신의 몸을 감당하지 못한 채 버거워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떠안을 만큼 건강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100퍼센트의 돌봄은 말처럼 쉽지 않다.
분리수거까지 마치고 집을 나선다.
“추운데 뭐 하러 나가냐”는 말이 따라온다.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걸 안다.
알지만,
토할 것 같은 오심과 무거운 몸,
끝없이 눈에 들어오는 할 일들 속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다.
골목길을 걸어 나온다.
작은 새들이 날고, 나무가 서 있고,
시장의 사람들 사이로 호떡 굽는 냄새가 지나간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쉰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감각이 겨우 돌아온다.
문득 생각한다.
내 아이들에게도 언젠가
엄마처럼 이런 표정과 이런 보살핌이 필요해질 날이 올까.
그때 두 아들은 이미 도망가 버릴 것만 같다.
숨 막히는 시간들,
아무리 애써도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상황들 앞에서
차라리 그 전에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스친다.
그만큼 이 돌봄은, 이 삶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일이다.
역할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
잠시 겪어본 이 시간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남긴다.
어쩌면 나도 힘들고, 엄마도 힘들다.
누가 더 힘든지를 가르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주변에는 또 다른 가족이 있지만
그들은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 마음조차 이해가 된다.
이 현실은 너무 무겁고,
누구에게나 감당의 한계가 있으니까.
정신을 차리자.
걷자.
자연을 보자.
요즘 유난히 힘든 날이 있다면,
다음에는 분명 조금 나은 날이 올 것이다.
둘의 컨디션이 모두 바닥이었던 시간은
이제 지나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본다.
힘들 때, 그 시간을 견디고 건너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걷고,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