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87. 통치 기술은 상과 벌 없이는 절대 작동하지 않는다.
유리한 일은 직접 하고, 불리한 일은 남을 통해서 하라. 전자를 통해 서는 호의를 얻고, 후자를 통해서는 악의를 피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호의를 얻기보다 배풀기를 더 좋아한다. 관대하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회사 동료가 보내준 책 몇 권 중에서 『일을 대하는 태도』(조준호, 퍼스트펭귄)를 가방에 넣었다. 자연스럽게 친정엄마는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교회에서 먹은 밥이 속에 꽉 막힌 것 같아 잠깐 걷기 운동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겨울나무는 앙상하지만, 하늘을 향해 치솟은 모습만은 분명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 나무를 올려다보며 감정에 휘둘려 힘들어하던 나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얇은 옷차림으로 힘차게 달리는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괜히 그 모습을 흉내 내보려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보지만 어색하다. 빠른 것은 마음뿐이다.
다시 내 속도를 찾는다. 천천히 걷는다. 다른 사람들의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내년이면 나도 저들처럼 뛰는 쪽에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곳곳에 강아지 유모차가 보이고, 대부분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다. 남녀가 함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걸어가면, 나는 괜히 남자에게 “강아지 형”이라고 속으로 부르며 앞질러 걷는다.
건강할 때의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앞사람을 빨리 추월해야 할 것 같았고, 한 바퀴라도 더 돌아 만 보를 채우려 애썼다. 요즘은 다르다. 천천히 걸으며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식물과 앙상한 나무를 자주 올려다본다. 빨리 갈 수 없으니 주변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한겨울 나무에 매달린 산수유 열매는 한여름 꽃처럼 빨갛다. 겨울이 끝나도 쉽게 떨어지지 않을 기세다.
카페 근처에 와서 2층으로 올라간다. 아무도 없다. 넓은 공간에 나 혼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 카페가 유지될까, 잠시 걱정이 든다.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니 막혀 있던 속이 풀린다. 이제 책을 편다. 이 책은 LG 임원에 오르기까지 40년간 일을 하며 깨달은 인생의 지혜를 담았다고 한다. 직장은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직업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 깊다.
두 시간 정도 읽기 딱 좋은 책이다. 30분쯤 지나자 나만의 시간에 작은 소리들이 스며든다. 여자 네 명이 앉은 테이블, 혼자 온 여학생, 그리고 7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 한 분, 모자(母子) 한 테이블. 모두 각자의 이유로 이 공간에 와 있다. 옆자리 여학생은 책을 읽다가도 휴대폰을 부지런히 들여다본다.
잠시 후,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70대 여성분이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다. 음료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이 떠나갈 듯한 벨소리가 울린다. 모자 중 아들의 전화다. 누나와 통화하며 저녁을 같이 먹자고 말한다. 테이블 위에는 음료와 여러 가지 빵이 놓여 있고, 엄마는 계속 얼마냐고 묻는다.
따뜻한 겨울 햇살이 창문을 통해 제법 강하게 들어온다. 오랜만에 느끼는 햇빛이 유난히 감사하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묘한 뿌듯함이 밀려온다. 같은 공간에서 모두가 각자의 언어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나는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어냈다. 그 사실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하다. 남은 음료를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처음보다 더 시원하고, 속도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다.
2월 말까지 서른 권의 책을 읽겠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오늘 읽은 책은 그중 열세 번째다. 작은 계획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음료를 사면서도 과소비는 아닐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 정도는 나 자신에게 주는 상이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