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켜내는 밥 한 숟가락과 호흡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6부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평정심

204. 행동이 힘들 정도로 많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쉬운 일은 어려운 일처럼 하고, 어려운 일은 쉬운 일처럼 하라. 전자는 자신감으로 인한 방심을 막아주고, 후자는 소심함으로 인한 낙심을 막아준다. 큰 어려움 앞에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너무 만히 생각하면 행동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생각이 행동을 가로막을 정도로 깊어져서는 안 된다. 쉬운 일은 어려운 일처럼 신중하게 하고, 어려운 일은 쉬운 일처럼 의연하게 대하라 했던가. 전자는 자신감으로 인한 방심을 막아주고, 후자는 소심함으로 인한 낙심을 막아준다. 큰 어려움 앞에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기보다 먼저 행동해야 한다. 생각의 늪에 빠지면 결국 행동은 마비되기 마련이니까.


새벽 2시, 정적을 깨는 소리는 엄마의 신음과 "할머니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아들의 다급한 물음이다. 눈을 떠야 하지만 몸이 천근만근이다. '나도 너희들만큼이나 아픈 몸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술을 깨문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린 뒤에야 겨우 시야가 들어온다.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내딛고 5분 동안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아들이 다시 묻는다.

"파스도 붙여 드렸는데 통증이 계속되나 봐요. 어떡하죠?"

숙인 고개는 더 아래로 떨어진다. 불면증을 뚫고 간신히 잠들었는데, 이제 오늘 밤 잠은 다 잤구나 싶은 절망감이 밀려온다.


천천히 발을 딛고 문고리를 잡고 의지하며 걸어본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친정엄마의 신음이 더 커진다. "어디가 아파?" 물어도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 하는 앓는 소리만 반복한다. 옆에 선 아들이 대신 전한다. 발이 계속 저리고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다고 하셨단다. 엄마의 언어는 오직 "죽겠다"는 한 문장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 부작용이 무서워 약을 끊은 뒤로, 가끔 찾아오는 이런 근육통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엄마를 괴롭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다. '정신 차리자. 딸이 되어 부모를 모시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하는 보호자가 되자. 그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닌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상비약을 찾아본다. 물 한 컵과 약 한 알을 건네니 엄마는 "그 원장님이 처방해 준 거 맞니?"라며 세심히 묻고는 이내 삼킨다. 아들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잠시 엄마를 바라본다. 다시 잠들기 전까지, 엄마의 통증에 대한 문답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나의 걱정이 엄마의 통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아픈 것은 누구의 문제인가. 내가 함께 소리 내어 아파한다고 고통이 줄어들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내 몸의 환경은 결국 내가 만드는 것인데, 부모의 아픔을 자식이 온전히 대신 감당할 수는 없다.

내가 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지금의 아들은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을까.

가족과 떨어지기 싫다는 엄마의 마음을 나는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3기 암 환자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보호자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엄마는 어떤 딸을 원하고 있을까.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처지가 되고 보니, 부모를 모시는 일이 예전과 다르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사실 아들이 깨워 일어난 뒤 내가 한 일이라곤 엄마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진통제 한 알을 챙겨드린 것뿐이다. 그런데도 앞으로의 막막함과 내 몸에 대한 걱정이 엉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만을 위한 '삶의 매뉴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긍정적으로 뇌 회로를 바꿔보려 애쓰지만 냉소적인 생각만 가득하다. 다행히 약을 드신 지 30분이 지나자 엄마의 신음이 잦아들고 이내 평온한 잠에 드신다.

아침 7시, 침대에 걸터앉은 엄마는 다시금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소리를 이어간다. 오심이 심해 속이 뒤집히지만, 된장찌개를 먹으면 좀 나을까 싶어 냉장고 속 채소를 꺼내 보글보글 끓인다. 기분 전환을 해야 하는데 새벽부터 깨어 있었더니 정신이 비몽사몽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 간극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또 걱정이다. 아침상을 차려 "엄마, 식사하세요"라고 하니 답이 없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너는 밥 먹을 생각이 나느냐'는 원망 섞인 표정으로 "아이고, 죽겠네" 소리만 되풀이하신다.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요즘이다. 엄마가 식탁으로 오지 않아도 나는 숟가락을 들고 밥을 크게 떠 입으로 가져간다.


나는 이 밥을 한 그릇 다 비울 것이다.

엄마가 더 아프다고 할 때 버텨낼 힘이 있어야 하니까.

엄마가 마지막 길을 떠날 때 내가 든든히 곁을 지켜야 하니까.

엄마가 서운해하며 욕을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딸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엄마는 내가 밥 먹는 대신 곁에 앉아 당신만 바라보기를, 통증 앞에 무릎 꿇고 제발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 나도 내 통증을 먼저 감당해야 해.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몫이 있어. 그것이 우리 서로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나는 그렇게 믿는다. 여느 일상처럼 요양보호사님이 출근하시고, 나는 집을 나선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 요가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버스 파업으로 도로가 한산한 이틀째, 버스가 다닐 땐 몰랐던 고요함이 거리 가득하다. 요가원에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1월이라 그런지 강당 안이 30여 명의 수강생으로 꽉 찼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온기를 나눈다. 차가운 강당 바닥에서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옮기며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깊게 숨을 내뱉는다. 여기서 다시 나의 호흡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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