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32. 지식이 실용적이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상인의 감각을 지니라. 모든 것은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옯겨야 한다. 너무 현명한 사람들은 속기 쉽다. 비범한 것은 잘 알아도 더 중요한 일상생활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속거나 비웃음을 당하지 않도록 상인의 감각을 지녀야 한다. 지식이 실용적이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오늘날 잘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이다.
지난주 교회에 갔다가 리플릿 사이에서 ‘설날 가정 예배’ 안내문을 보았다. 처음으로 예배를 집에서 해 보기로 했다. 설날 아침 식탁에 앉은 친정엄마가 물었다.
“예배 한다고 했잖아?”
며칠 전 나눈 말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세수하고 아침을 먹은 뒤에 하려고 했다고 답했다.
“밥 먹기 전에 하는 거야.”
천천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경 구절도, 찬송가도 찾아보며 익숙해지고 싶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 욕실로 향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배 순서를 보니 낯설지 않았다. 오랜 시간 지냈던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기도를 부탁하니,
“하나님 아버지시여!, 올해는 우리 딸 암 치료 잘 받아서 건강하게 살게 해 주세요. 꼭 기도합니다. 아멘. ”
그 한 문장이 전부였다. 가족 이야기도 함께 해 달라고 하자, 그 말이 다라고 한다.
시편 103편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문장 뜻도 선뜻 와 닿지 않았다. 성경책을 나란히 놓고 함께 읽었다. 중간중간 물었다.
“이건 무슨 자야?”라고 엄마는 몇 번이고 물어본다.
찬송가 번호도 낯설었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노래였다. 그런데 엄마는 곧잘 따라 불렀다. 요양사가 가끔 휴대전화로 틀어 주었다고 했다. 말씀 제목은 ‘은혜를 기억하며 새로워지는 가정’이었다.
한 시간 남짓 읽고, 듣고, 기도했다.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서툴렀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웃음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감사와 기도를 나누는 동안 가족이라는 단어가 다시 선명해졌다.
산책을 하려고 공원으로 나왔다. 걷다 문득 생각했다. 지금의 가족이 없다면 어떨까. 다섯 해 뒤 설날은 어떤 모습일까. 부모 존재 여부가 삶을 가른다. 형제들이 자녀 손을 잡고 인사하러 온다. 평소 입던 옷은 거부하고, 외출할 때 입던 옷을 고르는 엄마 모습에 놀란다. 덥다면서도 하루종이 입고 있다. 늘 아프다 말하던 엄마는 세배하는 사람마다 덕담을 건네는 지혜로운 어른이 된다.
지금 모습이 다음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은 흘러가고, 변화 방향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간이 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가족끼리 애써 상처 주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의도하지 않아도 욕심이 관계 틈을 벌린다. 돈도 다르지 않다. 이번 명절, 가족을 위해 쓰는 비용을 계산해야 할까. 움직임이 불편한 엄마에게 용돈을 아낄 이유가 있을까.
나뭇가지 끝에서 봄 기운이 보인다. 얼었던 호수는 풀리고, 오리 두 마리가 나란히 움직인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자는 다짐이 든다. 어설픈 가정 예배를 통해 지난 설날과 다른 점이 하나 생겼다. 평온함이다. 작은 리플릿 하나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꿨다. 유한한 시간 안에서 욕심이 삶을 해치지 않도록,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자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