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36. 위대한 정치인들은 미리 호의를 배푼다.
보상을 받기 전에 먼저 호의르 배풀라. 미리 배푸는 호의에는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미리 은혜를 배풀면 받은 사람은 더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같은 선물이라도 미리 주면 그것은 나중에 상대방이 갚아야 할 빚이 된다.
그 빚은 부담이 아니라 마음을 밝히는 빛이 된다. 생일날, 가족에게서 연락이 없던 날이 있었다.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보냈지만, 저녁이 되자 고독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렇다고 원망이 앞선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받는 순간 기대가 생기고, 기대는 때로 실망을 부른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기준선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해 생일에 회사 선배가 케이크를 보내왔다. 항암 치료 중이라 단 음식을 먹지 못하던 때였다. 상자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내가 이런 걸 먹지 못하는 걸 알 텐데 왜 보냈을까. 고마움보다 아쉬움이 먼저 올라왔고, 괜히 돈을 쓰게 한 건 아닐지 미안한 마음까지 겹쳤다.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말했다. “선배님, 케이크 고마운데 마음만 받을게요.” 선배는 웃으며 답했다. “일도 못 하고 생일도 조용히 보낼 것 같아서 보냈어. 기분이라도 좀 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너무 물건만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선물은 케이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취소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상자 안에는 설탕과 크림만 담겨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를 생각한 시간이 함께 들어 있었다.
명절이 되면 선배는 또 과일을 보낸다. 친정엄마와 함께 먹으라고 한다.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 속에서 택배 상자를 받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대로 받자니 죄송하다. 그래서 나는 더 큰 인사로 답한다. 오만 원이 오면 십만 원으로 돌려보낸다. 계산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고마움을 숫자로라도 표현하고 싶어서다. 그렇게 명절의 오고 감은 어느새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선배는 관계를 이어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선물은 핑계일 뿐, 본질은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생각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 관심이 없다면 이어갈 수도 없다.
나 역시 새해가 되면 먼저 인사를 해야 하나, 작은 선물을 보내야 하나 잠시 고민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지금은 건강이 먼저라고, 몸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괜히 애쓰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이 서운하기보다 다행스럽다. 나를 대신해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더 베풀기보다 잘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다. 건강을 지키는 하루가 곧 받은 은혜를 갚는 준비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당히 다시 서게 되는 날, 그동안 받았던 마음을 천천히 돌려주고 싶다.
먼저 베푼 호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 사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가장 필요한 순간 다시 빛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그 빛을 기억하며 오늘도 몸을 돌본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나 또한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