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사이에서 배우다

by 또 다른세상

세대 사이에서 배우다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40. 때로은 어리석음을 이용해야 할 때도 있다.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은 패배가 아니다. 아주 현명한 사람도 필요할 때는 한 발 물러서 모르는 얼굴을 한다. 모든 판단을 다 아는 듯 말하지 않는다. 말수를 줄이고 질문을 남긴다. 상대가 먼저 드러내도록 기다린다. 모르는 척하는 사람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좋은 평판은 앞장서서 빛나는 사람보다 한 걸음 뒤에서 상황을 읽는 사람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가죽을 걸치고 중심을 지키는 태도, 그 안에 계산과 절제가 함께 있다.

세상은 한 사람의 생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수많은 판단과 경험이 부딪히고 섞이며 방향을 만든다. 스쳐 가는 사람마다 지혜의 모양은 다르다. 나이, 직업, 학력은 판단의 깊이를 단정하지 못한다.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리다는 이유로, 병들고 늙었다는 이유로 통찰이 없다고 여길 수 없다. 오랜 시간 몸으로 겪은 경험은 책에서 배운 지식과 다른 결을 지닌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감각 또한 세대마다 다르다. 어느 한쪽이 늘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최근 휴대폰 가게에서 전화가 왔다. 5년 전 개통했던 매장이다. 집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곳이다. 직원은 새 카드를 발급하고 최신 기종으로 교체하면 추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며 예약을 권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혜택 카드가 만료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친절한 음성이 이어졌다. 오래 거래한 고객이라는 표현이 반복됐다.

약정을 맺은 뒤 요금은 자동이체로 빠져나갔다. 매달 빠져나가는 금액을 당연하게 여겼다. 할인 기간이 끝났는지, 다른 조건이 생겼는지 세밀하게 확인하지 않았다. 관심을 두지 않은 시간만큼 정보는 쌓이지 않았다. 상담이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예약을 했다. 매장 방문을 앞두고 처음으로 요금 명세를 조회했다. 기본 5만 원 요금제에서 통신사 안내로 20% 할인을 적용받아 4만 원대로 이체되고 있었다. 약정은 유지 중이었다. 연락해 온 매장은 어떤 근거로 추가 혜택을 말하는지 궁금해졌다.

예약 시간에 맞춰 방문해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때 컴퓨터를 쓰러 온 아이가 휴대폰을 바꾸려 하느냐고 물었다. 혜택이 있다고 하니 상담을 받아보려 한다고 답했다. 아이는 화면을 넘겨 보더니 절약할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알뜰폰 요금제를 사용하며 데이터 사용량을 직접 확인한다고 했다. 사용 패턴에 맞춰 요금을 조정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휴대폰 개통은 해당 매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줄 알았다고 말하자, 온라인 구매와 유심 개통 방법을 차분히 알려 주었다.

휴대폰 단말기는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유심칩은 별도로 구매해 직접 개통할 수 있다고 했다. 케이스와 보호필름도 함께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제 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보안이 염려된다고 하자 인증 절차와 환불 규정을 하나씩 보여 주었다. 요즘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구매한다고 덧붙였다. 화면 속 정보가 정리되어 나타났다. 선택지는 명확했다.


당일 도착 상품도 있었고 대부분은 다음 날 배송되었다. 그동안 사용해 온 요금제는 데이터 용량에 비해 과했다. 남는 데이터가 매달 소멸되고 있었다. 저렴한 요금제로 시작해 사용량을 보고 조정하면 충분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유심을 교체하고 데이터를 백업하는 동안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통신사 구조, 단말기 가격 형성, 카드 제휴 조건, 약정 기간의 계산 방식까지 들었다. 막연히 어렵다고 여긴 영역이 구체적인 숫자로 정리되었다.


그동안 매장에서 권하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설명은 친절했으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직접 비교하지 않으면 구조를 알 수 없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익숙함에 기대어 흘려보낸 시간이 아쉬웠다. 동시에 새로운 방식을 배우는 과정이 낯설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면 길은 열린다.


어른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경험은 자산이지만 변화의 속도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는 정보 탐색과 비교에 능숙하다. 화면을 통해 조건을 분석하고 위험을 가늠한다. 오랜 경험은 사람을 읽는 힘을 준다. 두 감각이 만나면 선택은 더 단단해진다.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모른다고 말하는 태도는 손해가 아니다. 필요한 지점을 인정하면 다른 지혜가 스며든다. 가르치는 자리와 배우는 자리는 고정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바뀐다. 휴대폰 하나를 바꾸는 과정에서 세대의 차이와 연결을 동시에 보았다.

결국 예약했던 매장은 취소했다. 충분한 비교 없이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조건을 따져 보니 기존 할인 혜택이 유지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새 카드 발급과 기기 변경이 반드시 이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친절한 제안은 선택의 한 방향일 뿐이다. 결정은 스스로의 이해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리석음을 이용한다는 말은 무지를 드러내라는 뜻이 아니다. 필요할 때 배우는 자리에 서고, 다른 판단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할 때 선택은 넓어진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가죽을 걸치고 묻는 사람, 그 사람은 배우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태도 안에서 지혜는 자란다. 휴대폰 요금 한 줄을 확인한 일상은 작은 계기였다. 익숙함을 의심하고 다른 설명을 듣는 시간, 그 과정이 판단을 단단하게 했다.


세상은 혼자 이해할 수 없다. 다양한 생각이 부딪히며 길을 낸다. 어리다고 가볍지 않고, 늙었다고 느리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얻은 지식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 사이에서 선택은 더 정확해진다. 어리석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 안에 성장의 여지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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