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의 뇌,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39.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기보다 지혜를 선택하라.


지나치게 똑똑해선 안 된다. 그것보다는 지혜로운 게 더 중요하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면 오히려 무기가 무뎌진다. 보통 가장 예리한 부분이 가장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한 것은 확실한 진리다. 또한, 명석한 건 좋아도 수다스러운 건 좋지 않다.


강사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요가학원에 가기 위해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나왔다. 마트에 들렀다. 2월 11일. 문득 아몬드 맛 빼빼로가 먹고 싶어졌다. 한 상자에 열 개도 채 들어 있지 않아 금방 먹어버리는 것이 늘 아쉽다. 네 개를 집었다. 요가원 강사님 두 분께 드릴 것 두 개, 그리고 아무에게도 빼빼로를 받지 못할 나와 엄라를 위한 두 개다.


상자 사진만 보고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요가학원에 도착해 태블릿에 출석 체크를 했다. 가방에서 하나를 꺼내 건넸다. 강사님은 “ 제일 좋아하는 맛이예요.” 라며


“감사해요.”


별것 아닌데도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탈의실로 올라가 수업 준비를 했다. 몇몇 회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직은 어색하다. 내 모습이 낯설어서인지, 서로 약간의 거리를 두는 느낌도 든다.


두 모녀 회원과는 조금 더 가깝다. 수업이 끝나면 함께 내려가 오뎅을 먹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명절을 앞둔 어느 날, 모녀는 오뎅을 네 개씩 먹고 나는 하나만 먹은 뒤 순대와 떡볶이를 주문했다. 같이 먹자고 하니 미안하다며 조금씩 집어 먹었다. 다른 일정이 있는 날이면 계산은 자기들이 해야 한다며 만류해도 기어이 치르고 갔다. 포장마차 사장님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게 정이죠!”


두 사람은 늘 예쁘게 화장을 하고 수업에 집중한다. 비타민은 챙겨 먹는지, 요가는 몸이 허락하는 만큼 해야 한다는 말이 오간다. 따뜻한 대화가 흐르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놓인다.


수업이 시작됐다. 명상으로 조용히 호흡을 들여다본다. 한 호흡이 이렇게 소중하다니. 작은 동작 하나에도 몸의 온도가 오른다. 격한 운동만이 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다 사바사나에 들어가면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하다. 가끔은 코 고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다시 탈의실로 모인다. 시작 전보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원장님이 출근했다. 수업은 하지 않지만, 늘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배우고 싶은 표정이다.


“오늘 11일 맞죠?”


나는 남은 빼빼로 하나를 건넸다.


“두 분은 당연히 남친에게 받으실 것 같은데, 제 것 사면서 같이 샀어요. 맛있게 드세요.”

다들 환하게 웃으며 받았다. 작은 선물이 주는 기쁨과 감사가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마다 초콜릿이 쌓여 있었다. 그제야 번뜩였다.

아, 내가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를 헷갈렸구나.

강사님들은 무슨 생각으로 받았을까.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었을까.


요즘 내 뇌는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순간 기억과 판단에 자주 오류를 일으킨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고 싶고, 더 똑똑해지고 싶다. 그러나 항암제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나만 살짝 인지하고 지나가면 좋겠는데, 오늘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앞뒤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오류 상태의 뇌가 맞는 줄 알고 그대로 행동했다. 제어하는 기능이 약해진 걸까,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걸까.


지혜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지금의 나는 과연 지혜로운가.

그래도 나누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그 마음이 내 실수를 덮어 주었다고 믿고 싶다. 다음 날도 두 강사님은 변함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한결같음이 고마웠다.


앞으로는 마음이 움직이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내 뇌를 다그치기보다, 천천히 바로잡아 주는 시간을 갖자. 실수를 껴안고도 다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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