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햇살 아래, 엄마와 걷는 시간

by 또 다른세상

엄마와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는 봄햇살처럼 하루를 연다. 바람 끝에는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지만, 햇빛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을 지나 설이 지나고 나니, 계절은 조금씩 자리를 옮긴다. 산책을 나설 때면 두터운 외투 대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르게 된다. 감기와 장염으로 한동안 기운이 없던 엄마도 요즘은 햇살을 받으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봄빛이 어깨 위에 내려앉으면, 건강도 다시 움틀 수 있으리라 믿는 눈치다.

산책길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다. 엄마는 휠체어에서 잠시 일어나 운동기구에 몸을 기댄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 발로 서 있는 그 모습이 대견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치매 어르신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 사이로 대화가 흐른다. 나이를 묻고 띠를 이야기하며 금세 친구가 된다. 작년에는 언니라 부르던 분이 오늘은 동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름이 적다며 웃는다. 옆에서 누군가 “내일은 주민등록증을 가져오라”고 농담을 건네면, 그 자리는 금세 웃음으로 환해진다. 그 웃음이 봄빛처럼 번진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모습도, 갑자기 서운함이 올라와 발걸음을 재촉하는 장면도 일상이 되었다. 며칠 전까지 반갑게 인사하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루는 기쁨으로, 하루는 걱정으로 채워진다. 계절이 바뀌듯 시간도 흘러간다. 그래서 오늘 웃을 수 있음이 더 소중하다. 순서 없는 이별을 알기에,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더욱 빛난다.


엄마의 자리는 여전히 자식 걱정으로 이어진다. 중년이 된 자식에게도 밥은 잘 먹는지, 몸은 괜찮은지 묻는다. 손주들이 모두 가정을 이루었어도 엄마 마음은 여전하다. 병든 몸으로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어도, 결국 자식의 마음을 먼저 다독인다. “다른 걱정 말고 네 일 해. 예수님이 도와주실 거야.” 그 말 속에는 평생 쌓아온 믿음과 사랑이 담겨 있다.

요즘 엄마는 성경을 읽는 데서 더 나아가 노트에 필사를 한다. 하루 천 자를 쓰면 치매 예방에 좋다는 방송을 보고 시작한 일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눌러 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세월을 지나, 여든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 글을 읽고 쓰는 기쁨을 이어간다. 그 성실함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아프지만 삶의 태도는 곧다. 몸은 약해져도 마음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 등을 보며 배운다. 힘이 들 때면 이유를 밖에서 찾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대부분은 마음의 피로에서 비롯된다. 생각의 뿌리를 다독이면 다시 숨이 고르게 이어진다.

노환과 암 3기를 안고 있지만, 엄마의 하루에는 여전히 봄빛이 스민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웃고, 걷고, 쓰고, 기도한다. 함께 걷는 이 시간 속에서 새봄은 조용히 자란다. 엄마의 봄빛은 오늘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데운다. 그 온기 속에서 또 한 번 희망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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