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의 하루, 마음을 비우며

by 또 다른세상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마음을 비운다.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느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암 환자에게 계획대로 모든 것이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머릿속 한켠에는 되돌아가는 날도 있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본관에서 피검사를 받으라는 안내문과 간호사의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면서 오른쪽 팔을 걷어 올리고 팔뚝을 살살 쓰다듬는다. 내 번호가 불리고, 생년월일과 이름을 말한다. 잠시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며 전화를 건다. 검사 장소가 별관이라며 안내받는다. 담당 간호사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하자, “죄송해요. 연락 문자를 해야 하는데 잊었네요.”라는 솔직한 답이 돌아온다.


서둘러 별관으로 이동한다. 평소보다 20분 정도 늦었다. 파란 창구 1076번 앞에서 외투를 벗고 팔을 다시 걷는다. 오른쪽 팔은 이미 혹사당하고, 왼손은 아직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다. 계속 한 팔만 사용하니 피곤하다. 오늘 검사 선생님의 손길은 노련했고, 따갑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바늘을 뽑고 지혈, 스티커까지 직접 챙겨 주었다.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저녁이 되어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설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검사를 마치고 진료 접수증을 발행한 뒤 체중과 혈압을 등록한다. 키는 그대로지만 몸무게는 늘었다. 새벽에 나오니 배가 고프다. 지하 1층 암 환자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늦게 왔는데도 네 곳이나 빈자리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앉아 사과와 생밤, 삶은 달걀을 먹는다. 꿀맛 같다.

잠시 후 60대 중반쯤 보이는 분이 옆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젊은 남자 두 명도 함께 와서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진다. 그녀는 남편이 지금 막 수술실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병원에 오니 안심이 되어 잠을 잘 수 있었다며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병을 키워서 오게 된 남편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셋은 빵과 음료를 먹으며 주식, 손녀, 케이크 맛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수술 경험이 있어 수술실 안의 남편이 더욱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러던 중 “엄마, 주식 좀 팔아서 병원비 해.”라는 말에 잠시 당황했다. 자식이라 해도 아픈 부모에게서 병원비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걸까.


진료 시간이 다가와 일어선다. 오늘은 입원 병동에서 항암 치료를 받을 동생도 오는 날이다. 친구에게 연락해 위치를 알려 주고, 멀리서 걸어와 꼭 안아 주었다. “잘 살아 있네.” 반갑게 인사하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와 식단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는 야채는 삶아 먹어야 한다며 혼을 낸다. 빵과 과자를 먹는다고 하니 큰일 날 것 같다며 앞으로 절대 먹지 말라 한다.


2층으로 올라가 담당 간호사를 만났다. 다시 장소 연락을 제때 하지 못해 사과한다. 간호사는 괜찮다고 웃으며, 오늘 항암을 맞을 수 있는 수치인지 묻는다. 다행히 수치가 좋아 맞을 수 있다며 안심시킨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늦어 항암이 지연되지만, 결국 호명되어 담당 간호사와 함께 들어간다.


교수님은 이름을 부르며 모니터를 확인한다. “오늘 전체적으로 수치가 좋아요. 불편한 곳은 없나요?” 손발 저림과 붓는 증상이 있다고 말하자, 약을 먹고 있느냐고 묻는다. 효과가 없어서 복용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자 놀란 표정이 보인다. 약은 2주 정도 꾸준히 먹어야 효과가 있으니, 다시 처방해 주겠다고 한다.

약을 기피 했던 나를 돌아본다. 혼자 판단한 것이 병을 길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약도, 밥도, 운동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진료가 끝나고 담당 간호사는 웃으며 이제 끝이 보인다고 말한다. 앞으로 다섯 번만 잘 맞으면 끝이라는 말은 가장 좋은 소식이다. 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항암 치료 중 기쁜 날이다. 일정대로 항암을 맞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약도, 밥도, 운동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조용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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