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친구로, 나는 나로서는 시간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7부 인생의 진정한 공부를 마지막으로 미루지 말라


온전함

257. 친구가 사이가 틀어지면 최악의 적이 된다.

절대 인간관계를 끊지 말라. 그러면 꼭 평판에 상처를 입는다. 누구나 친구일 때는 만만한 상대였더라도, 적이 되면 만만치 않은 상대로 변한다. 선은 소수가 행하지만, 악은 거의 모든 사람이 행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다면, 폭발적인 분노 때문이 아니라 좋았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변명하는 편이 낫다.


친구가 틀어지면 가장 아픈 적이 된다는 말을, 나는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때 웃음을 나누던 사이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관계를 끝내는 일에 늘 서툴렀다. 좋았던 시간을 지워버리는 일 같아서, 차라리 조금 불편한 채로 남아 있는 편을 택해왔다.

2025년 가을, 춘천에서 고등학교 친구 여덟 명을 만났다. 오랜 시간 흩어져 있던 이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결혼식 사진 속에서 함께 웃던 얼굴들이, 이제는 각자의 시간을 견디고 지나온 표정으로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나보다 먼저 결혼했고, 자녀를 키워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앉아 있는 나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몸은 쉽게 피로를 드러냈다. 수술과 방사선을 지나왔고, 다시 항암을 앞두고 있다. 내 몸은 분명히 예전과 달라져 있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달려온 친구들이 있었다. 건축 일을 하는 친구,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 은행과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들. 각자의 삶을 나누며 웃다가도, 문득 내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손길이 따뜻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가슴안에 부딪혔다.

누구보다 가까웠다고 믿었던 친구와는 조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오랜 시간의 공백이 우리 사이에 얇은 막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말은 자주 끊겼고, 마음은 쉽게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웃었다. 그 웃음 하나로, 여전히 친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한 친구가 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얼마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친구였다. 슬픔을 지나온 사람의 집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따뜻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다음 날 우리는 케이블카를 탔다.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정상에 올라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든 치료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구들에게 무엇인가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현실은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왔다. 누군가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기원하는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는 점점 뜸해졌다. 변화가 낯설지 않으면서도, 조금 서운하다. 그들의 하루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날의 만남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친구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을까, 아니면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위로였을까. 정답을 찾으려다, 이내 멈췄다. 그보다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외로웠다. 자꾸 기대고 싶어졌고, 그래서 더 쉽게 서운해졌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안다. 친구는 친구로 두고, 나는 나로 서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그 마음을 붙잡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쓴다. 문장이 어색해도 괜찮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마음속에 쌓여 있는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사람은 때로, 자신에게 여유가 없을 때 관계를 뒤로 미룬다. 사실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괜찮다. 가을의 이틀은 분명 진짜였으니까.

손을 잡아주던 온기와, 아무 이유 없이 함께 웃던 순간들. 그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기억을 믿는다. 오늘도,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아픔 속에서 더 선명해진 감정들까지도, 이제는 나의 삶이라고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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