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우리는 아마 철학자일지도
어린 시절의 일이다. 초등학생 시절로 추정된다. 길을 가다가 왠지 멜랑꼴리 해지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떤 특정한 호르몬의 영향인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서 내가 죽은 후를 상상했다. 여러 가정이 올라왔다.
1. 내 존재가 사라져서 내가 아예 없어진다면?
2. 새로운 세계가 있다면?
3. 교회에서 배운 대로 천국이 있다면?
그러면서 나름 생각의 꼬리를 물고 길을 걷곤 했다. 길을 걸으면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엄지공주만큼 작아지면 어떨까?' '내가 동물과 말을 한다면?'과 같은 공상에서부터,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죽는다면?'등과 같은 생각을 어린 나이에 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철학적 사유를 하며 자라고 있을 것이다.
- 조르지오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수, 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1914년
내가 미술 작품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 그림을 보면 굴렁쇠를 굴리며 가고 있는 소녀가 마치 우리 인간이지 않는가 싶다. 햇빛이 비치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지만, 한편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소녀도, 그리고 어린 시절 나도 어쩌면 '삶'을 생각하는 동시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화가는 유한한 인간의 불안과 실존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은 아닌지. 어른이 되었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실존에 관한 질문이 더 늘고 있다. 특히, 자녀를 계획하면서 그 질문이 끊임없이 맴도는 것 같다.
"쉽지 않은 세상인데, 자녀를 낳아야 할까?"
"이 자녀가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우리가 모두 세상을 졸업할 때가 올 텐데, 그때와 시기를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렇다고 이런 고민으로 내 시간이 멈추질 않는다. 난 끊임없이 내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낸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채로. 마치 키리코의 그림에서 소녀가 굴렁쇠를 굴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유한한 인간이기에, 철학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계를 지닌 인간이고, 한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에,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이다.
철학 philosophy, 哲學인생, 세계 등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필로'는 사랑한다는 것이고 '소피아'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또한 철학의 철(哲)은 '밝을 철'이다. 밝음을 배우는 것.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그림자 가운데 빛을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인생에 대해 더 고민하고, 나아간다. 무지라는 어둠 속에서 빛을 갈구한다. 철학자는 가난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난 왜 철학에 관심이 가는가? 어쩌면 이것은 나와 세상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근원적 질문 가운데 인간은 고뇌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에 많은 실존적 질문은 '성경'으로 답이 귀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들과 삶의 문제들 속에서 '물음표'는 늘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닌다. 어쩌면, 인간은 철학자의 유전자를 타고났으며, 고난 속에서 그 유전자가 더욱 발현되는 것 같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한다. 유한한 인간으로 고민한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굴렁쇠를 굴린다. 지나간 과거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내가 통제할 수 없기에, 내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내게 주어진 굴렁쇠를 굴리며 인생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