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위한 글쓰기인가?
과연 내가 글쓰기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수업코칭연구소에서 '수코연6남매'라 하여 여러 강좌가 열렸다. 그중에서 난 '글쓰기'모임 섬김이를 맞게 되었다. 처음부터 왠지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강좌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선생님들께 도움이 될지도 자신 없어서 조용히 내 이름을 지웠다. 그러던 중 일을 진행하는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고, 결국 다시 모임 섬김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어떤 말을 선생님들과 나눠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옛날부터 '책 쓰기'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모았던 정보를 정리했다. '작가가 되는 법', '출판 기획서 쓰는 법', '글을 다듬는 법' 등 여기저기 모은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정리했다. 맥락상 어떻게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야기 흐름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어린 시절 일기장도 뒤적거렸다. 교사 시절 일기장도 열어보다가, 힘들 때 쓴 일기를 보며 약간 우울감도 밀려왔다.
아직도 초임 시절 일기장은 쉽게 펼쳐보기가 힘들다. 일기장을 열면, 타이머신을 타듯 내 머릿속 사고는 12년 전으로 날 데리고 간다. 그러면 거기에서 난 어떻게 할지 몰라 애태우는 날 만난다.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하고 있는 무력한 날 만난다.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날 만난다. 그 아슬아슬했던 시간들, 슬픔이 파도치던 시간들, 그 시간 속으로 함몰되어 버린다.
잠깐 동안 우울한 감정에 빠졌다가 다시 나온다. 개인 상담을 받으며 상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린다. "그때의 어려움이 지금의 선생님을 있게 했어요." 그렇다. 그때의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내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학교폭력과 왕따,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썼지만 신규교사의 한계에 좌절하며 울며 기도하던 그 시절, 다시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복불복이라고 한다. 교사는 한 해에 어떤 학생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친구들,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가 학생들의 1년 생활에 큰 영향을 주겠지. 그런데 학급에 공격적인 성향의 학생, 반항적인 학생이 있을 경우 그 학생을 지도하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사랑으로 학생에게 다가가지만, 그걸 파워게임에서 이겼다고 생각해 교사가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면 훈육이 어려워져 버린다. 그렇다고 학생과 기싸움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명확하게 규칙을 설명하고 생활지도를 잘하고자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가 부족한 나로서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OOO, ㅅㅂ년' 이때까지 내 눈앞에서 보지 못했던 내 욕을 학생의 책상에서 보았다. 머리가 아찔했다. '왜 내가 이런 욕을 들어야 하지? 내가 이런 욕을 들을 만큼 잘못했을까?' 학창 시절 조용히 모범생으로 자라온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사춘기 아이가 얼마나 불만이 많았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면서도 그런 욕을 먹으며 아이를 감싸고 사랑하는 것이 여간 아픈 일이 아니었다.
그때 쓴 시(2009년)를 읽으니, 내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지 고함을 지른다.
아이들
사랑하려 합니다
그러나 가시를 껴안는 고통을
참아내다
내 여린 심장이
신음과 울분을 토해냅니다.
눈물로 내 마음을 싸매고
다시 아이들을 품습니다.
아... 내 마음이 이리도 좁구나.
아이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구나.
아이들에게 가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내 마음이 온통 가시밭.
아팠던 날 안아준다.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애썼어.
감상에서 빠져나와 다시 글쓰기 강좌를 위한 PPT를 만들었다. 잠깐 나의 이야기도 넣었지만, 나의 불안한 내면을 감추고자 화려한 남의 이야기들로 PPT를 채웠다. 브런치 작가가 되면 초반에 어떻게 해야 검색에 노출이 잘 되는지, 블로그에 글을 어떻게 누적하면 책이 되는지 등등 다른 곳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강의 후에 선생님들과 강의를 하며 생각한 것과 앞으로 어떻게 모임을 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하면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난 나 자신에 갇혀서 실제 선생님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가가 되는 법이라든지, 브런치에 합격하는 법이라든지, 구독자를 늘리기 위한 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위한 글쓰기가 필요했는데 내가 잘못짚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저 내 이야기만을 마냥 늘어놓은 듯했다.
누굴 위한 글쓰기인가? 나의 글쓰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난 왜 글을 쓰지? 브런치를 왜 하지? 블로그를 왜 할까? 분명 날 돌아보고 성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콘텐츠를 쌓아 책을 내고 싶은 외재적 동기가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브런치에서 '구독자'수라든지, '좋아요' 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에도 나는 그 숫자에 괜스레 신경을 쓰며 더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기를 바랐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느라 글쓰기 본질을 얼마나 깊이 있게 고민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우선은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썼던 것 같다. 이 글쓰기가 나의 영혼에 도움이 되었는가? 내 마음에 도움이 되었는가? 그럴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내가 차분히 시간을 갖고 깊이 고민할 때에는, 내 영혼을 보듬는 글이 나왔지만 내가 시간에 쫓기거나 무언가 성공을 향해 내달릴 때에는 글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글쓰기 또한 하나의 성과물을 내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선생님, 말이 빠르고 진행 속도도 빨라요." 한 선생님의 말씀에, 내 마음이 깨어났다. 휴직인데도 늘 쫓겼던 탓은, 내가 날 재촉하고 성과를 내라고 닦달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진실되게 살며 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난 익명의 타자들의 마음에 드는 책을 쓰느라 골몰했던 것 같다.
사실, 책 쓰기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시작하다가도 작심삼일이 되어 멈추어버린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꾸준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들 앞에서 글쓰기를 논할 수 있겠는가? 부끄러워진다. 습관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지 못했던 태도가 부끄러웠다.
'글쓰기' 자체에 고마운 것이 많다. 글쓰기를 향한 내 서툰 태도에도, 글쓰기는 나의 마음을 치유해 줬고, 내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연결해줬다. 시간을 건져와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고, 날 성숙하게 해 줬다. 때로는 아픈 과거도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줬다.
글쓰기를 논하려면, 글쓰기와 더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난 글쓰기랑 많이 친하지 않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가, 귀한 시간을 내어 강의를 들어주는 선생님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우선은 내가 글쓰기를 통해 내 마음을 돌본 것처럼 선생님들과 함께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가서 글쓰기에 관한 책을 한 아름 빌려왔다. 거기에서 나보다 앞서 글쓰기와 친해지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글쓰기를 좀 더 알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친한 친구를 소개할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듯이 친한 친구가 된 글쓰기에 대해 나누고 싶다. 남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더 나아가 우리가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